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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오후 티타임, 정진석의 적군묘지 법안

 

임혜현 기자 | tea@newsprime.co.kr | 2021.05.07 10:23:29

[프라임경제] 초나라 귀족 오자서가 억울하게 부친과 형을 잃고 오나라로 도망쳐 절치부심 복수전을 시작한다. 그는 '손자병법'의 저자인 손무와 더불어 오나라를 강국으로 성장시키고, 결국 초나라를 공격한다. 

초나라 군대를 몰고 오나라의 도성까지 진입하지만 원수 평왕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오자서는 분풀이로, 평왕의 무덤을 파 시신을 끌어내 300번이나 매질을 가한다. 

이런 가혹한 모습에 초나라 충신인 신포서가 벼슬을 버리고 사라진다. 오자서가 상종 못 할 위인이라고 본 것이다. 그는 나중에 사람을 보내 "그대의 복수가 너무 지나치다. 때로는 많은 사람이 하늘을 이길 수 있다고 하나 결국은 하늘이 사람을 이긴다고 했다"며 "시신에 모욕을 가하니 이보다 더 하늘을 거역하는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라고 힐난한다. 

그 비판을 들은 오자서는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어 다른 방법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고 답했다고 한다. 전하기에 따라서 아직 분이 안 풀려서 이를 갈며 "일모도원"을 이야기했다고도 하고, 부끄러워 하거나 탄식하면서 "일모도원"을 외쳤다고도 한다. 후자였다는 글이 더 많은 것 같다.

동양의 저 고사에 깔린 세간의 기본 정서에서 보듯, 무덤을 해코지하거나 시신에 모욕을 가하는 것은 심한 일로 치부된다. 서양에서도 금기시되는 것으로 안다. '국가의 적'쯤에나 가해지는 걸로 역적이라고 다 그렇게 하지도 않는다.

죽은 이를 끌어내 목을 치는 것에 대한 충격과 거부감이 얼마나 컸으면 지금도 심한 처사에 "사람을 두 번 죽이는 일"이라고 표현하겠는가? 

이번에 정진석 국민의힘 의원이 이른바 '파묘 퍼포먼스 금지법'이라 부를 만한 법안을 대표발의했다. 국립묘지에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이들이 묻힌 때에, 과를 더 크게 평가해서 혹은 원천적으로 그런 경우 안장 자격에서 과락(F, 즉 낙제)이니 묘를 옮기자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고 그런 때 그런 퍼포먼스를 기획할 수 있다.

왜 무덤을 옮기자고 주장하고 파헤치는 일을, 설사 그것이 퍼포먼스라 해도 갑남을녀의 정서적 거부감에도 단행하는 상황이 됐을까? 

이를 살펴 보면, 상대적으로 진보 진영에서 지금이라도 역사적 재평가와 처벌을 해야 한다는 쪽에 기우는 것으로 보인다. 보수에서는 이는 지나치다는 생각에 더 기운다.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을 세우자는 측면을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내지 '날이 저무는 데 갈 길은 아직 먼 것처럼, 너무 늦어서 이렇게라도'라는 애타는 심경을 전혀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무덤을 깨거나, 시신을 끌어내 처단하는 것은 고금을 통틀어 극히 드문 일이다.

심지어, 중국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문화대혁명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은 공이 7, 과가 3"이라고도 민감하고 복합적인 인물 평가에서는 '과감한 정리'를 해 버리기도 한다는 점도 거론하고 싶다. 

대한민국 정통성 세우기를 이야기하면서, 일명 문제적 인물들이 세운 공, 여순사건 같은 적색 분자들의 온갖 준동과 전면전(6.25)에서 공로를 세운 면을 싸그리 0로 계산하자는 건 일종의 모순이기도 하다.   

정 의원의 법안은 그런 점에서 해는 지는데, 갈 길은 너무 멀다며 탄식하는 슬픈 상황에서 조금 더 여유가 있다. 시간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다 그렇다.

오후 티타임쯤, 적과 대화를 시도하며 "방편을 찾는 데 열린 자세로 응할 테니, 제발 그런 스스로도 지나치다 찔릴 일은 하지 말자"고 제의하는 것 같은 법이다.

구상 시인은 인해 전술 끝에 남의 나라에서 고혼이 된 중국군들을 묻은 묘지를 둘러보고서는 '적군묘지'를 썼다. 치열하게 이념과 땅을 놓고 싸웠지만 이제 그 살과 뼈를 '우리 손으로 그러모아' 최소한의 군인에 대한 경의를 갖고 장사를 치러줄 마음은 6.25 때에도 있었다. 지금의 날선 대립 정서 전쟁 국면에서 양측 진영 모두 겸허히 살피자는 게 정 의원의 심경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이런 점을 보면, 거물 정치인이란 그저 선수만 쌓인다고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그의 선친, 정석모 전 건양대학교 이사장은 '화이부동'을 모티브로 삼았던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민주정의당에 부역했다는 논란에도 지역에서 지금도 호평받는 데에는 이런 정치철학이 큰 덕이 되고 있다. 

서울대학교 법대 출신인 고인은 의무를 회피하지 않고 6.25 전란 중 경찰에 투신했다. 경찰이 그야말로 군인처럼 총을 들고 전후방에서 적색 세력과 싸우고, 군인처럼 무수히 죽어나가던 때다. 그럼에도 정적들에게 가혹하거나 누명을 씌우는 식으로 정치를 하지 않았기에 지금도 명성이 남아 있다. 그 맥락을 정 의원이 지금 잇고 있는 셈이다.

부족한 깜냥이라, 감히 지금 이 시점에 이번에 제출된 '파묘 퍼포먼스 금지'라는 작품을 '좋은 법안'이라고 단정하지는 못 하겠다. 그러나 '품위있는 법'을 스케치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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