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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현 사장학] 남의 식(式)만으로는 안 된다

[제38강] 글로벌리제이션(Globalization)과 수펙스(SUPEX) 추구 1

허달 코치 | dhugh@paran.com | 2012.07.18 10:42:55

[프라임경제] 요즘은 글로벌리제이션(Globalization)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게 되었다고들 하기에 최근의 언젠가 워크숍 과정 중에 참가자들에게 물었다.

“Globalization이 우리나라 경제에 이로운 것인가요, 아니면 불리한 것인가요?”

“…,…”

모두들 옆의 사람 눈치만 살필 뿐 분명히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문제를 출제한 나부터도 딱히 정답을 준비하고 있지 못한 이슈이니 이해가 되기는 하였다.

그러니, 1980년대부터 국제경제 커뮤니티(community)에서 이런 이야기가 이따금씩 나오면 그것이 우리나라에, 우리나라 기업에 어떤 위협이 되는지,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더더욱 많았을 수 밖에.

최종현 회장은 1990년 대 초에 그 나름의 식견으로 글로벌리제이션을 ‘무한경쟁시대’의 개막이라고 정의하고, 기업은 생사를 걸고 이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니 대단한 선각자였던 셈이다. 필자도 그런 영향을 받아 2001년에 집필하였던 강의록 ‘천년 가는 기업 만들기’ 첫 장(章)을 글로벌리제이션 이야기로 시작하였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때의 관점을 바꿔야 할 것이 많지 않은 점 희한하고 또한 흥미로우니 아래에 붙여 참고해 보자. 
 
<남의 식(式)만으론 안 된다>

글로벌리제이션의 시대입니다. 글로벌리티(Globality)라는 말도 생겼지요? 세계화(世界化)가 이미 현실이 되었다, 그런 뜻이겠지요.

경영환경(經營環境)도 그렇지요. 지난해 2000년 10월 중순에는 매일경제신문이 주관하여 세계적인 지식경영 포럼이 우리나라에서 열렸지요? 무슨 말들을 하는지는 알아야 할 것 같아 나도 다녀왔습니다만, 글로벌한 환경변화에는 글로벌한 방법 즉 서구식 경영법으로 무장(武裝)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이 설득력 있어 보입디다.

일본식이 미국식을 이기고 전세계에 그 위용(威容)을 자랑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소위 80년대 경영합리화 기법이 설치던 시대였죠. 미국이 머리를 싸매고 일본을 공부하더니 90년대에 들어서서 디지털 혁명의 깃발을 앞세워 다시 일어나 상황을 뒤집습니다.

   

‘역시 경영학은 미국 것을 배워야 해!’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경영학자, 교수, 경영연구원장, 소위 전문가들은 모두 미국의 경영대학원에서 수학하고 온 분들이니까 이제 그들이 안도(安堵)의 가슴을 내리 씁니다. 자칫 잘못 했다간 일본식 경영학 공부를 다시 해야 할 뻔 했으니까요.

글로벌리제이션 시대이므로 국가, 민족이라는 것이 기업경영과는 관련 없는 개념이라는 주장도 눈에 띕니다. 주로 정치, 경제 모든 측면의 강대국인 미국 사람들 얘기지만요. 장래의 기업은 그런 개념을 뛰어 넘어야 한다, 아니 이미 기업이 강자이고 국가는 약자이다, 그렇게들 주장도 합니다. 우리 대통령, 정치가, 관리 나으리 님들 들으시면 불쾌해 하시고, 코웃음 칠 소리지만요.

실제 요즘 우리나라 같이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 행정과 금융이 합심하여 기업의 발전을 죽자 사자 방해하려 하는, 그런 기업환경에서는 어쩌면 그 길만이 유일한 살 길인지도 모릅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기업도 국가도 모두 결딴 나는 길들로만 가고 있다고 개탄하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으니까요.

50년 안에 없어질 국가들이 많다, 그렇게 레스터 서로 박사는 말했더군요. 방정 맞은 말이지만 그 리스트(list) 안에 아주 유력한 후보로 우리나라가 들어 있지 않다고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국가를 운영한다는 사람들이 기본책무 너무 소홀히 하고 부정직(不正直)한 표(票) 놀음에만 놀아나고 있다는 것, 말은 안 해도 누구나 다 알고 있죠. 그러니 '기업이라도 살아남아 민족의 훗날을 도모하자면 벗어나야 해!' 그런 주장이 나올 법도 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만이 전부일까요? 우리나라 기업은 어서 다국적 기업이 되는 길이나 모색하고, 글로벌 스텐다드(Global Standard), 글로벌 메니지먼트(Global Management) 흉내 내서 탈(脫) 한국을 지향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백보(百步)를 양보해서 논리가 그렇다 하더라도, 그 탈(脫) 한국은 도대체 무얼 가지고 한다지요? 한국 국적 포기하면 누가 세계 시민권 준비해 두었다가 내어 준답니까? 남들보다 나은 것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일등(一等)만이 지배하는 냉혹한 세계가 글로벌 마켓(Global Market)이라고 방금 저들 포럼을 통해 듣지 않았습니까?

이어령씨가 88올림픽 직후에 펴낸 ‘한국의 기업정신’이라는 책을 한번 함께 보시겠습니다.

문학이 주업(主業)인 그가 어떻게 해서 기업경영과 관련된 이런 책을 쓰게 되었는지, 여러분도 그 내력이 궁금하기는 할 것입니다. 그 내용을 보게 되면 더 한번 놀라게 되는 것이, 그의 젊은 시절 글들의 냉소적이며, 신랄한 비판적 색깔들이 180도 바뀌어, 긍정적이고 고무적으로 바뀌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아마도 88 올림픽 개막식, 폐막식을 성공적으로 치르는 과정에서 그 기획과 실행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그가, 일을 맡아 수행했던 대소 기업들과의 협력 과정을 통해 우리나라 기업인들의 특질을 그 특유의 날카로운 관찰과 예지로 꿰뚫어 보고, 감동 받아, 무언가 남겨야겠다는 생각에서 이 책을 쓴 줄로 짐작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 뜻있는 저술(著述)은 여의도 전경련회관 강당에서 가진 한번의 ‘재미있는 강연’ 정도로 받아들여진 뒤, 사계(斯界-기업경영과 관련된)에서 별로 읽혀지지 않고 잊혀졌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지요? 우리나라뿐 아니라 소위 학자, 전문가라는 분들은 대체로 이런 국외(局外)의 조언자(助言者)들이 제시하는 새로운 시각에서 무언가를 느끼고 받아들일 열린 태도를 아예 꺼려 합니다. 정통을 주장하는 역사학자들이 재야 사학자들 주장, 단군조선이니, 비류백제니 아무리 떠들어도 거들떠 보지도 않는 것과 일맥상통하지요.

그러나 누가 뭐래도 나는 그의 다른 책들과는 달리, 이 책이 추구한 긍정적인 한국인 상(像)이 매우 좋아서 이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한 권 있던 책을 누군가에게 빌려주었더니 없어져서 공저자(共著者)격인 서울대의 박우희 교수 서가(書架)에서 빌어다 복사를 했을 정도였죠.

요컨대 기업(企業)은 구성원(構成員-회장이든 신입사원이든)이 이의 주체(主體)이며 생존기계이고, 우리나라 기업은 주로 우리나라 사람들로 구성할 수 밖에 없으니 우선 그들(우리나라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알아야 기업 경영을 잘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나라 사람은 왜 물에 빠졌을 때 서구인들이나 일본인들처럼 ‘도와달라!’고, ‘구해달라!’고 하지 않습니까? 왜 물에 빠져 경각(頃刻)을 다투는 그처럼 급박한 상황에서도 ‘너는 사람이므로 사람인 나를 구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식(式)의 인간 본성(本性)에 호소하는 ‘사람 살류!’라는 외침을 외치게 되었을까요? 그저 단순한 언어 구조의 차이입니까? 이런 외침을 들었을 때 들은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자기가 헤엄칠 줄 모른다는 사실도 잊고 웃통을 벗고 물에 뛰어 든 사람도 있었다고 가끔 신문 기사에 실리지요?

요즈음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분도 계시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말씀하는 그분에게 질문합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자신에게만 대답 하십시오.

당신은 어떤 사회 속에서 살고 싶습니까? 당신이 물에 뛰어들도록 강제 당하는 일만 없다면, 그래도 남을 구하기 위해 웃통을 벗어 던지고 물에 뛰어드는 사람이 열에 두어 명은 되는 그런 나라, 그런 사회, 그런 기업에서 일하며 살고 싶지 않으신가요? (이 글 다 쓰고 난 뒤인 2001년 1월도 저물어 가는 어느 날 일본 열도를 감동의 물결로 뒤흔든 이수현 군의 의로운 죽음이 있었습니다. 이어령 씨의 통찰이 예언이 되었습니다 그려.)

그의 분석(分析)에 의하면 서구(西歐)의 경영은 노하우(Know-how)노하우의 경영, 일본의 그것은 노와이(Know-why)의 경영, 우리나라의 그것은 노왓(Know-what)의 경영이라고 합니다.

명분(名分, 실은 命分이라고 쓰면 더 분명한 뜻이 되겠습니다만)이 있으면 자신을 던지는 그런 문화 원형(原型-Archetype)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 우리의 전통 속에, 우리의 집단 무의식 속에 내재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지나온 30년 무엇을 위해 가족도 내팽개치고, 모은 재산 하나도 없이, 허구한날 회사, 회사 하고 살아왔느냐고, IMF 소용돌이에서 느닷없는 퇴직선고(退職宣告)를 받아 들고, 울며 묻던 아내들에 대한 우리 세대 소위 엘리트 경영인들의 대답이 (당시에는 꿀 먹은 벙어리 노릇들을 했겠지만요) 이런 것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이들만이 아닌, 같은 시대의 소위 식자(識者)들의 명분과 가치의식이 그러했었기에, 엄청난 정치적, 사회적, 또 법과 정의(正義)의 비효율 속에서도 (한마디로 예나 이제나 도둑놈들 들끓는 속 아닙니까?) 한강변의 기적(奇蹟)은 이루어졌던 것이 아닌지, 아마 누군가가 근세사연구를 통해 증명해 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포스트모던 기업경영에서 더욱 중요해 질 뿐 아니라, 장차 글로벌리제이션 시대에 우리나라 기업이 성공하는 중요한 덕목(德目)이 된다니요?

아무리 경영학자가 아닌 문학가, 또는 설혹 88올림픽의 망외(望外)의 성공에 고무(鼓舞)된 국수(國粹)주의자(이어령 씨 죄송함다)가 한 말이래도 궁금하지 않습니까?

기업경영을 위한 성공적 모델을 문화의 원형에서 찾아보려는 노력은 그렇기에 매우 신선한 작업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우리나라 기업이 소위 다국적 기업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도, 도대체 잠깐이나마 세계를 놀라게 한 그 엄청난 잠재력(Human Potential)이 어디서 왔는가를 구명(究明)하고 앞으로 올 세계화의 다른 환경에서는 어떻게 이를 변형하여 응용할까 하는 점을 연구하여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한번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냐? 이어령 씨가 이 강연을 통해 이렇게 피력(披歷)했습니다.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라는 재미난 일본관(觀)을 피력하여 그가 요즘 말로 한참 떴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일본 방방곡곡에 초빙 받아 다니면서 강연을 했다지요. 강연 마치고 소변 보러 화장실에 가보면 등 너머로, 강연 듣고 나가던 일본인 청중들이 거기 연사가 있는 줄도 모르고 자기들끼리 지껄이는 반응을 듣게 되는 경우가 간혹 있었답니다. 열에 일고여덟은 ‘아, 리 상(樣) 주장에 일리가 있어’, ‘우리가 못 본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이야’ 등 어쨌든 그 내용을 논평(論評)하는 긍정적인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강연을 우리나라 청중에게 하고 그 반응을 화장실에서 들어보면 이런다는 것이지요. ‘아, 이어령 그 친구 말은 참 잘하는데’ 정도가 최상의 평가구요, ‘야, 이어령 그 친구 웃겨, 지가 언제부터 일본을 그렇게 잘 안다고…’, ‘그 친구 원래 팥으로 메주 쑨다구 눈 하나 깜짝 안하고 말하는 작자라구’ 등 강연의 내용과 관련 없는, 강연자의 자질에 대한 폄훼(貶毁)가 주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구두닦기(요즘은 구두미화원이라고 높여 말해야 합니다만) 이야기도 있습니다. 미국의 비버리 힐즈 근처에도 구두닦기는 있다지요. 그들은 롤즈로이스 타고 멋진 금발 여인 태우고 가는 억만 장자들 모습을 보면서 하염없는 선망의 눈초리를 보낸다는 것이지요.

‘나는 언제나 저런 자동차 한번 타 보나~’ 진심으로 부러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울에서는 사정이 좀 다르다는 것입니다. 미화원이 구두 닦던 손을 멈추고 옆 눈으로 힐끗 그 광경을 보고는 침을 탁 땅바닥에 뱉는다는 것이지요. ‘지나 내나 하루 세끼 먹고 살기는 마찬가지야!’

이런 구성원, 이런 한국인들과 함께 일하며, 존경과 신뢰를 이끌어내어 한강(漢江)의 기적을 이루신 여러 경영자님들을 진심으로 존경해 마지 않는다고 청중을 농(弄) 반, 칭찬 반 어르면서 했던 이야기입니다.

휴먼 커뮤니케이션을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로 삼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바로 우리가 함께 웃고 울며 기업을 경영하고 부대끼며 살아야 할 그 사람들이라는 것이 축복(祝福)입니까, 아니면 제약조건입니까? 생각해 볼 과제입니다. 견강부회라고 어느 분이 말씀하는 것 들었습니다. 달걀꾸러미와 고봉이 무슨 문화의 원형이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한가지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함께 일해야 하는 구성원들이 우선 한국인이며, 그들의 가치체계가 서양인들, 중국인들, 일본인들의 그것과는 독특하게 다른 어떤 것이라는….

다 옮기지 못하여 거두절미 하였으니, 독자 여러분 어떻게 읽으셨는가? 이 글 쓴지 10년 너머 지났건만 우리가 닥친 현실은 여전하지 않은가? 이 당시에는 이렇게 감상적인 어투로 국수주의적 대응을 말할 수도 있었지만, 글로벌리제이션은 냉혹한 현실이라는 것이 이제 와서는 더욱 명확해졌다. 

[Globalization과 SUPEX 추구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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