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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수륙연합격전지 순천 왜교성 전투 왜 조명받나

호남 유일 일본식 성곽...이순신 등 조.명.일 명장 총투입

박대성 기자 | kccskc@hanmail.net | 2012.04.23 01:44:17

[프라임경제] 임진왜란 마지막 해전인 동시에 조.중.일 삼국이 펼친 국제전이었던 순천 왜교성(倭橋城) 전투.

전남 순천 도심에서 약 10km 가량 떨어진 해룡면 신성리에 자리한 순천 왜성은 군수물자 조달이 쉽고 일본군의 퇴각이 용이한 해안가에 축조된 성이라는 점에서 전형적인 왜성의  특징을 보여준다.

순천 왜성이라 부르기도 하며, 예교, 왜성대, 망해대, 신성포성, 순천성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고 있다. 일본군에 의해 축조된 일본식 왜성은 울산, 남해, 사천 등 경남에 20여 곳이나 남아 있지만, 호남지방에는 순천 왜성이 유일하다.

   
 순천 왜성 내부모습. 왜성은 주로 부산과 경남지방에 다수 분포돼 있으나, 호남에서는 이곳 순천 왜성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정유재란 종결의 마지막 최대 전투지인 순천 왜교성전투는 1598년9월20일부터 11월19일까지 2개월간의 전투를 말한다. 이 전투는 조.명 연합군이 왜군 장수인 소서행장(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이 기획해 축성한 왜성에서 명장들이 대거 참여한 전쟁이다.

수륙 양쪽에서 공격했지만 해안가 절벽에 견고하게 축성된 왜성으로 인해 왜군 3000여명이 사망했으나, 조선.중국 명나라 연합군의 피해도 커서 명 전선 30척이 격침 당해 2000여명이 전사했으며, 조선 휘하의 군사 130명도 전사했다.

이후 풍신수길 와병설이 퍼지며 전의를 상실해 퇴각하는 일본군을 관음포에서 격침시키는 노량해전(관음포해전)이 시발됐던 전투이자 임란 7년전쟁을 마무리하는 전투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에 대한 참전 3국 가운데 명.일의 자료는 부실하기 짝이 없다는 지적이 나왔다. 순천대는 임란 7주년을 기념해 지난 18일 '정유재란과 순천 왜교성 전투'라는 주제의 학술대회를 열었다. 

학술대회는 시민들의 무관심 속에 진행됐지만, 왜교성 전투를 조명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는 점에서 늦게나마 기사화를 시도했다. 왜성의 흔적은 남아 있지만, 부근이 전부 산단으로 매립됐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정구복 명예교수는 이날  '한.중.일 사료로 본 왜교성 전투의 주역들'이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중국 명나라 측 자료에 1598년 9월20일 순천왜교성과 함께 공동으로 실시된 울산의 도산전투나 사천성 전투에 대한 기록은 비교적 상세히 전하면서도 최대 격전지였던 예교(왜교)성 전투에 대해서는 거의 실상에 대한 기록이 없다"며 이는 3국이 참가한 전쟁주역에 대한 평가에 대해 3국의 입장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정 교수는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인 순천 왜교성 전투의 교훈을 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유적을 보존해야 하며, 더불어서 삼국(한.중.일)의 자료가 서로 상충되는 부분은 정확하고 객관적인 사료비판을 통해 연구가 진행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 교수는 왜교성 전투의 주요 특징으로 ▲임란 침략 주인공인 소서행장(일), 명나라 명장 유정, 수군 장수 진린, 도원수 권율, 이순신 등 3국 명장이 대거 참여한 전투였다는 점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로서 울산 도산성 가등청정(加藤淸正) 군대와 사천성 도진의홍(島津義弘)을 동시에 치는 공성전이었으면서도, 두 곳의 왜성공격과는 다른 수륙합동으로 공격했으나, 견고한 왜성으로 명군이 성공하지 못한 전투였다는 점이다.

   
 일본식 왜성의 특징은 내성과 외성으로 중첩되게 견고하게 쌓아 올리고, 내부를 미로처럼 만들어 적을 헷갈리게 하는 전술적인 의미도 있다고 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또한 ▲공성과 화의가 동시에 진행된 전투로, 긍정적으로 보면 상호 교섭은 전략의 일부이자 피해를 줄이는 방책이나 반면 뇌물을 주고받고 장수의 성품을 알게된 전투였다는 점 ▲중국,일본과 달리 우리나라의 사료는 진경문의 '예교진병일록', 이순신의 '난중일기' 등에 전투가 상세해 재구성된 점 등을 꼽았다.

소서행장은 임란 당시 거침없이 공격하며 살육행위를 한 것과 달리 임란 7년째에는 수비의 입장에서 포로가 되느냐, 일본으로의 귀국에 성공하느냐의 갈림길에서 치른 왜교성 전투는 화전의 양면작전인 수비와 탈출전략이었다.

내상을 입었으면서도 그가 무사히 일본으로 탈출에 성공한 것은 강인한 무사정신, 갖은 지혜를 짜내는 능력, 부하 통솔능력, 지형을 이용한 축성술(왜성) 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분석했다. 

그 때 순천 왜교성에는 왜군 1만5000명이 주둔했다고 한다. 왜교성은 전투가 일기 1년전인 1597년 9월부터 12월까지 약 3개월에 걸쳐 조선인을 징발시켜 불과 3개월만에 축성공사를 마무리했다. 왜교성은 서쪽만 육지일 뿐 동.남.북 3면은 바다로 둘러싸여 전투와 물자조달에 유리했다.

전라역사문화연구소 이훈 상임고문(무등일보 전 주필)은 '정유년 전남동부지역에 남긴 이충무공의 발자취'라는 발표에서도 "광양만 장도(獐島)와 묘도(猫島), 불우(해룡 선월마을 불모퉁이로 추정)는 정유재란때 마지막 공방전이 치열하게 전개됐던 역사의 현장이다"면서 "왜교성 바로 아래 바다는 이미 메워져 율촌산단을 조성하고 있고 덤프트럭이 쉼없이 들락거리는 곳이 됐지만, 매립전에는 왜교성 발치에까지 광양만의 푸른물이 차올랐던 곳"이라며 안타까워 했다.

   
 22일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해안가에 자리한 순천왜성을 찾았으나 주변이 전부 매립돼 산단으로 변했다. 수군기지였던 장도(오른쪽)는 이미 육지로 변했으며 야산도 깎여 삭막해 보인다.

그는 또 "왜교성에서 장도까지 약 2km를 산단부지에 포함하려는 것을 학계에서 간신히 막아 형태만은 건졌으나, 섬의 흙을 파내 원형이 훼손됐고 매립돼 더 이상 육지가 아니다"며 "연합수군의 최전방 수군기지인 장도와 묘도, 육군의 전초기지인 불우, 그리고 부유(주암 창촌으로 조명연합군 후방기지)가 대책없이 방치되는 것은 부끄러운 일로, 아울러 백사정(장흥읍 원도리 추정)과 군영구미(강진 고군면 또는 장흥 회천면 군학마을 추정)의 위치를 확정하는 체계적인 조사와 연구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송은일 전남대 이순신해양문화연구소 연구실장은 '정유재란과 순천지방의 실정'이라는 연구발표에서 "정유재란이 일어난 직접적 계기는 조선을 배제한 명.일간에 무리하게 추진된 강화교섭에서 찾을 수 있다"며 "정유재란 당시 전라도지방은 전례없는 최악의 병화를 입은 지역이었고, 그 중에서도 왜성이 축조된 순천지방은 일본 주력군인 소서행장이 주둔하고 있어 그 피해는 상상할 수 없었다"고 적시했다.

정유재란은 풍신수길의 작전 명령이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남김없이 공략한 다음 충청도와 그 밖의 지역을 공략하라는 것이었다. 전라도에 침공한 순간부터 약탈, 방화, 살륙행위를 저지르는 잔악상을 보여줬다.

특히 조선인이라면 무조건 코를 베어 소금에 절인 통에 담아 본국 풍신수길에게 바치는 잔악성이 극에 달했다고 한다.

순천지방은 전라좌수영 관할구역으로, 해전의 기지가 되었다는 점에서 정유재란 이전부터 각가지 전비(戰備) 마련에 혹독한 정쟁피해를 당한 지역이라고 밝혔다.

송 교수는 명.일 강화교섭이 결렬된 이유에 대해 ▲명 심유경과 일 소서행장이 양국 조정을 동시에 기만하면서 무리한 교섭을 추진한 점 ▲풍신수길이 요구한 강화조건을 명의 경락부에서 사실대로 명의 조정에 보고치 않고 은폐한 가운데 강화교섭을 추진한 점 ▲명이 일본의 강화교섭을 낙관하고 안주한 점 ▲조선을 뺀채 명.일간 강화교섭 추진 ▲조선이 강화교섭 반대만 고수하면서 명.일 강화교섭에 소극으로 일관한 점 등을 꼽았다.

장학근 임진왜란사연구회장은 '왜교.노량해전에 나타난 조.명.일 기동항해진형'이라는 연구발표에서 "명은 안파선식지도와 분관이영파도, 일경파도 전술전형을 보여줬으며, 일본 수군은 사료부족으로 기동전술을 밝혀내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그 이유로, 임란 해전에 참여한 일본 수군 장수들이 그들의 전과를 자랑하기 위해 해전 전과에만 치중했을 뿐 구사한 기동항해 술에 관련된 기록은 하지 않아 일본학계의 연구성과도 해전 참전인원과 선박수, 전과의 기록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고 전했다.

장 회장은 또 "조.명 연합 함대는 적선 400여척을 침몰시켰으며 그 사이 소서행장은 남해섬 서남단을 돌아 부산으로 도주했으며 미처 노량해협을 건너지 못한 일본 군선들은 배머리를 돌려 퇴각함으로서 지루한 7년간의 임진왜란은 끝났다"며 "왜교성과 노량해전은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이자, 가장 치열한 전투였으며 이전의 해전에서 장수들의 사상자가 없었던데 반해서 노량해전에서는 충무공 이순신을 포함한 성장급 지휘관 다수가 전사했다는 사실이 격전지였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조원래 순천대 명예교수는 '참전기록을 통해 본 왜교성 전투의 실상'이라는 발표에서 "정유재란 마지막 단계인 왜교성(왜군 1만5000명 성안에 주둔) 전투에서 최대규모의 조.명 수륙합동군(5만5000명)이 동원됐음에도 왜교성 함락에 실패한 것은 왜교성이 난공불락의 요새였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순천왜성 천수기단 사진. 왜군 장수가 이 곳에서 병력을 지휘했던 곳으로 추정되며, 평소에는 적의 동태를 감시하는 장소로 쓰였을 것으로 역사학자들이 보고 있다.

1598년 전투 당시 왜교성의 형세와 관방(關防)의 면모에 대해 '예교진병일록'에 적시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예교(왜성)는 산형이 우뚝 솟아 그 형상이 마치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것과 같다. 주위 삼면이 바다에 접해 있고, 일면은 육지와 이어져 순천부로부터 좌수영에 이르는 대로변이 있다. 동쪽으로는 광양과 인접하여 갯벌밭이 경계가 되고, 남쪽으로는 남해도로 통하는 바다가 있고 장도가 그 앞 2리쯤에 있다...소서행장이 5층 망루를 지어 백토를 칠하고 기와를 씌웠으니, 그 모양이 마치 솟구치는 새날개와도 같았다...(후략)』

조 교수는 왜교성전투가 정유재란기 최대규모의 전사로 기록돼야 하는 까닭에 대해 병력 5만5000명이라는 군세 때문만은 아니며, 7년 전쟁으로 인해 인력과 물력이 고갈된 실정에서 의정부와 육해상군 지휘부가 모두 이 전투에 투입돼 총력을 다했다는 점에서 전사에 큰 의미를 뒀다.

조 교수는 "조선은 수모를 겪으면서도 명에 도움으로 일본을 섬멸해 7년전쟁을 끝내려는 복안이었으나, 명군은 종전이 임박한 상황에서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려 했고 전쟁종식의 동력임을 입증하려 했다"면서 "명은 이 상황에서 강화회담을 위장한 '소서행장 생포작전'을 연출한 어처구니없는 한바탕 희극은 임진왜란 중 가장 치졸하고 저급한 작전사례로, 대(大)명제국 무장으로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발상의 위계였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순천왜성은 현재의 왜교성 경관과는 전혀 다른 16세기 말의 왜교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실화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크며, 1598년 9월20일 난공불락의 전장에서 수륙의 총공격전을 펼친 조.명 연합군의 전투실황을 보면서 정유재란의 역사를 생생하게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 지방사 교육에 반영될 경우 그 역사교육적 가치는 매우 클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김선동 의원(순천.곡성)이 율촌면 장도 보존을 위해 작년 8월 여수 김성곤.주승용 의원, 광양 우윤근 의원 등과 왜성전투 역사공원 조성방안을 협의한 바 있어 향후 행보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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