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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금융위기 1년] “부동산, 지금이 투자 적기”

<인터뷰> 제23대 미주한인회 총연합회 남문기 총회장

박지영 기자 기자  2009.09.11 09: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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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한인총연합회 남문기 회장>

 
[프라임경제] 지난 3일 오후4시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미주한인총연합회 남문기(56·뉴스타그룹 회장) 회장과 인터뷰 일정이 잡혔다. 취재팀은 약속시간 5분여를 남겨두고 호텔 지하주차장에 도착했다. 이때 들려오는 불길한 휴대폰 진동소리. 예감은 적중했다. ‘10분정도 늦을 듯하니, 좀 기다리라’는 남문기 회장 쪽 전언이다. 늘 그랬다. ‘높으신 분’을 인터뷰 할라치면 기다리기 일쑤였다. 빡빡한 스케줄 탓인 걸 알면서도 기자입장에선 살짝 ‘빈정’ 상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상대의 ‘당연한 것 아니냐. 그냥 받아들이라’식 말투는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지 않다. 그러나 미주한인 250만을 대표하는, 연매출 30억달러의 걸어 다니는 ‘광개토대왕’인 남문기 회장은 사뭇 달랐다. 누구나 꿈꾸지만 아무나 이룰 수 없는 ‘아메리칸 드림’을 일군 남문기 회장과 나눈 얘기들을 소제에 맞게 정리한 것이다.

미주한인총연합회 남문기 회장은 ‘칼’이었다. ‘10분정도 늦는다’더니…. 정확히 4시10분,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사실 지금처럼 독대한 건 아니지만 남문기 회장을 본 건 이날이 꼭 두 번째다.

지금으로부터 약 5년 전 일이다. 2005년 9월, 미국 LA에 본사를 둔 부동산 중계기업 뉴스타 부동산그룹이 한국 진출을 앞두고 서울 코엑스에서 사업설명회를 열었다. 연매출 30억달러, 임직원 2000여명 규모의 뉴스타그룹은 미주 한인 최대 부동산재벌이다. ‘남문기’란 이름 석 자를 머리에 새긴 건 바로 이날이었다. 

남문기 회장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었다. 구수한 시골아저씨 인상에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 트레이드마크인 ‘빨간넥타이’도 예전 그대로였다.

   
 
◆300불로 일군 아메리칸드림

학창시절 남문기 회장은 한 마디로 ‘문제아’였다. 학교를 ‘땡땡이’ 치는 건 기본이었다. 가방 속에는 교과서 대신 잡지와 만화책이 가득했다. 할 줄 아는 것은 다만 싸움뿐이었다. 고등학생 때 세 번이나 전학을 다녀야 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남 회장은 “고등학교 시절이 거의 끝나가던 무렵 나를 받아준 학교에서 받은 내 번호는 28반 129번이었다. 보통학교에서 어떻게 129번이란 번호를 받았느냐,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 학교는 퇴학생들이 가는 마지막 코스였기 때문이다”며 철없던 사춘기 시절에 대해 말문을 열었다.

남 회장에 따르면 이 학교는 적어도 ‘쓰리스타(세번 퇴학당한 사람)’ 이상의 문제아들이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졌을 때 찾아가 졸업장을 받는 학교였다. 문제가 있어도 필요한 등록금만 내면 누구에게나 졸업장을 줬다는 것이 그의 부연설명이다.

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남 회장은 “자살충동을 느낄 만큼 절절한 반성을 했던 결심 때문”이라고 답했다. 

남 회장은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은 후 1년 동안은 집 근처 독서실에서 죽기 살기로 공부했다. 남들이 정규학교에서 3년 동안 착실하게 공부해 온 것을 3개 고등학교를 전전하면서 허송했으니 눈에 불을 켜고 쫓아가야 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목숨’을 건 반성 때문이었을까. 그는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인 건국대학교 법정대 행정학과에 당당히 합격했다. 그곳에서 지금의 아내 제니 남(한국명 최성원)도 만났다. 남 회장과 최성원 씨는 1981년 4월25일 흥사단본부 강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대학을 졸업한 후 1980년 1월, 남 회장은 옛 주택은행에 입행했지만 2년 만에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공부를 더 하기 위해서였다. 82년 남 회장은 단돈 300달러를 들고 부인과 함께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대박인생의 시작이었다.  

   
 
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당장 학비도 없어 손위 처남 집에 얹혀살았다. 남 회장은 “처남 집 창고에 짐을 던져놓고 그길로 일자리를 알아보러 다녔다. 생계를 위해 아무 일이나 붙잡고 할 수밖에 없었다. 공부도 좋지만 일단 먹고 살아야 했기 때문”이라고 회상했다.

미국에 건너가 그가 처음 한 일은 메인테넌스, 쉽게 말해 청소부였다. 남 회장은 “가식적인 후일담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청소하는 일이 즐거웠고 재밌었다. 될 수 있으면 재미있게 일 하려했고 그러다 보니 정말로 재밌어졌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우리 뉴스타그룹 지사를 방문할 때면 소매를 걷어붙이고 직접 청소를 할 때가 있다”고 말했다. LA 인근 청소업계에 ‘청소하면 남문기!’란 우스개소리가 돈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청소업계(?)를 재패한 남 회장은 다음 타깃으로 부동산업을 노렸다. 1987년 부동산 중계 라이선스를 딴 그는 1년 만에 뉴스타부동산그룹을 출범시켰다. ‘광고’에 대한 남 회장의 남다른 생각이 오늘날의 성공신화를 있게 했다. 남 회장은 신문광고 뿐 아니라 버스정류장 벤치, 골프장 스코어 카드 등 각종 판촉물에 그의 사진과 이름을 새겨 넣었다. 나중에는 대형 빌보드 광고도 했다.

광고 문구는 이 한마디였다. “잘하겠습니다”. 광고 전략은 적중했다. 속된 말로 대박이었다. “잘하겠습니다”란 말은 한인 사회에서 유행어가 됐다. 남문기, 미국명 ‘크리스 남’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1988년 9월25일, 드디어 ‘리얼티월드 뉴스타’라는 부동산회사가 탄생했다. 그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20년 만에 미국, 캐나다, 한국 등지에 50여개 오피스와 8개 계열사를 세웠다.

   
 

다음은 남문기 회장의 성공기 및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미국 부동산시장 현황 등을 일문일답 형식으로 풀어낸 것이다.

-‘남문기’하면 ‘미국서 가장 성공한 한국인’이란 인상이 짙다.
▲나에 대해 사람들은 곧잘 ‘미국 이민 100년 역사상 가장 성공한 기업인’이라 생각하지만 난 여전히 성공에 목마르다. 아직 내 꿈을 이루기에는 갈 길이 멀다.

-성공비결이 뭔가.
▲지금도 지켜오고 있는 습관인데, 나는 장거리 출장을 가지 않는 한 가장 먼저 출근해서 가장 늦게 퇴근한다. 아침 7시에 출근해서 보통 자정에 퇴근한다.

-오늘의 뉴스타그룹이 있기까지 위기를 겪은 적은 없나.
▲1999년에는 이라크 전쟁이 발발했고, 1991년에는 아델란토 땅 투기 광품이 불었다. 또 LA에서 일어난 4?29폭동 여파로 한인들은 경제적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때부터 1994년 어느 시기까지 부동산업계에는 찬바람이 휘몰아쳤다. 그 시기 아내가 자금난으로 무척 마음고생을 했다. 가장 실적이 좋았던 우리 뉴스타부동산도 사무실 유지비가 부족해 1만달러, 5만달러, 10만달러 이렇게 손가락으로 헤아리며 손위 처남에게 자금을 융통했다.

-힘든 시기를 어떻게 이겨냈나.
▲좀 더 광고하고, 좀 더 친절하고, 좀 더 많이 뛰고, 좀 더 노력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민을 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도 내 힘이 닿는 데까지 도움을 줬다. 이민자들은 뉴스타부동산의 잠재 고객이었기 때문이다.

   
 
◆세계금융위기… 그 후 1년

-LA한인타운은 어떤 곳인가.
▲LA한인타운은 유명한 이름에 비해 그다지 번화한 곳이 아니다. 높은 건물도 별로 없다. 1970년~80년대 서울 외곽을 연상하게 하는 정도다.

-그곳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가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서브프라임 부실로 인해 금융시장에서 촉발된 사태가 전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지만 언론에서 떠드는 것처럼 그렇게 심각한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실제로도 그런 정도의 위협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미국 부동산시장이 전반적으로 침체를 면치 못하고 있다.
▲서브프라임 사태로 인해 금융시장이 혼란스럽고 융자가 힘들어져서 미국 부동산 시장이 어려워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거래가 안 되는 건 나름의 이유가 있다. 팔려고 하는 사람이 실제 가치에 비해 너무 높은 가격에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약 LA를 비롯한 미국 부동산에 투자할 생각이 있다면 지금이 적기다. 미국 부동산이 3년 동안 35% 가까이 하락했는데 이제 더 떨어져봐야 얼마나 떨어지겠느냐. 은행이 처분하려는 압류 주택도 많이 줄었다. 우리 회사도 2003년 이후 처음으로 지난달과 이달 LA에 상가 두 곳을 매입했다.

-메릴린치와 씨티그룹 CEO가 서브프라임 부실에 따른 어닝쇼크로 경질됐다. 사태를 너무 낙관적으로 보는 것 아닌가.
▲최소한 한인타운만 보면 문제가 별로 없다. 한인들 중 서브프라임 융자를 받은 사람은 100명 중 5명도 안 된다. LA의 경우 한인타운 자체가 동쪽으로는 다운타운 빌딩들, 서로는 베벌리힐스나 벨에어 혹은 브랜트우드 등 부자동네, 북으로는 산, 남쪽에는 흑인촌 등으로 둘러싸여 있어 수요와 공급에 의해 굴러갈 수밖에 없다.
10년 전에는 한인들의 경제력이 미약했지만 지금은 10배 이상이 됐고, 이자율도 10년 전의 절반(5%) 수준이다. 또 LA는 전 세계에서 인구가 계속 유입되고 있으며, 기업들도 많이 입주하고 있어 전망이 밝다.

-미주한인총연합회장으로서 봉사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들었다.
▲돈 벌어서 자기 혼자 폼 잡고 도네이션(Donation)을 하지 않는 사람들, 하더라도 자기 이미지 개선을 위해 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혼자 잘 사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봉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타고 나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봉사단체장은 다 해봤다.
우린 부동산사업을 하니까 어차피 한인타운과 함께 가야 한다. 부동산은 혼자가 아니라 같이 가는 사업이다. 한인 커뮤니티의 성장 덕분에 오늘날의 남문기, 뉴스타가 있을 수 있었다.
돈은 움직이면서 생산적으로 벌어야 한다. 부자는 고용을 창출하고 돈을 쓸 줄 알아야 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해야 진정한 부자다.
   
 

-한국 정부에 바라고 싶은 것이 있다면.
▲지금 LA를 비롯한 캘리포니아주 남부 일대에 사는 한인이 총 130만 명인데, 재외국민 참정권 문제와 미국 비자 면제가 해결되고 한미FTA가 비준되면 한인 200만 명 돌파는 시간문제다.
정부 차원에서 LA에 대한 관리를 잘해야 한다. 이제 국경의 개념은 없어질 것이다. 한인들이 사는 곳이 곧 제2의 한국이다.
재외국민에게도 참정권이 주어져 한국 대선에서 한 표를 행사하게 해줘야 한다. 이중국적도 허용해야 한다. 한국 국적을 취득하려면 미국 시민권을 포기해야 하는데, 이는 힘든 얘기다.
재미교포를 잘 활용하면 한미관계에 훨씬 도움이 된다. 주미대사도 국가관이 투철하면서도 미국에서 자란 사람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