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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회장님들의 어처구니없는 글 솜씨

‘거인의 명복을 뵙니다’? ‘편히 잠드스소’?

박지영 기자 기자  2009.07.10 22: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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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49재’는 죽은 이를 떠나보낸 뒤 치르는 제사의례다. 불교에선 ‘칠칠재’라고도 부른다. ‘49재’를 지내는 까닭은 인간이 죽은 다음 날부터 49일 동안 후손들이 정성을 다해 재를 올리면 죽은 이가 다음 세상에서 사람으로 태어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2009년 7월10일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충격적인 서거소식이 들려온 지 딱 49일째 되는 날이다. ‘49재’를 지내면 노 전 대통령의 영혼은 영영 우리 곁을 떠난다.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노 전 대통령이 마지막 유언으로 남긴 이말 한마디가 작은 울림으로 다가오는 건 오늘이 바로 ‘노 전 대통령의 49재’이기 때문이다.

‘49재’의 뜻을 알리기 위해 기자수첩을 쓰기로 결정한 건 아니다. 다만 ‘노 전 대통령 49재’ 의식을 바라보면서 잠시 잊고 있던 에피소드 한토막이 떠올라 노트북 앞에 앉게 됐다.

   

노 전 대통령 서거 닷새째인 5월27일 정부 공식분향소인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벌어진 일이다. 기자는 분향소에서 ‘뻗치기(취재원이 나타날 때까지 현장에서 오랫동안 머무는 것을 칭하는 말)’ 중이었다. 재계의 높으신 분들이 언제 어느 때 추모현장에 모습을 나타낼 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재계서열 2위인 현대·기아차그룹 정몽구 회장이 이날 오전 8시10분께 모습을 드러냈다. 부회장 8명과 함께였다. 이어 코오롱그룹 이웅열 회장과 금호아시아나그룹 박삼구 회장이 분향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로부터 약 1시간 뒤 삼성생명 이수빈 회장을 비롯한 그룹 사장단 30여명이 빈소를 찾았다. 정기 수요회의를 마치고 다함께 버스를 타고 분향소를 찾은 것이었다.   

롯데그룹 신동빈 부회장도 사장단 10명과 함께 얼굴을 비췄다. ‘은둔형 경영자’로 유명한 신 부회장을 바로 코앞에서 볼 수 있었다.

이 밖에도 두산그룹 박용현 회장을 비롯해 교보생명 신용길 사장, 동원그룹 박인구 부회장, 농협중앙회 최원병 회장 등도 등장했다.

문득 회장님들은 조문록에 어떤 말을 썼을까 궁금했다. 다행히 상주 관계자가 흔쾌히 조문록을 보여줬고, 기자는 ‘높으신 분’이 쓴 글을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고품스런 글귀는 없었다. 쉬운 맞춤법조차 틀린 경우가 허다했다. 이수빈 회장은 ‘습니다’를 ‘읍니다’로 썼다. 이 정도는 그나마 나았다.

신동빈 부회장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썼는데, ‘고인’을 ‘거인’으로 표기했다. 신 부회장을 변호한다면 ‘한자로 풀이하면 거인도 맞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더라고 ‘거인’은 틀린 말이다. 만일 한자로 쓸 요량이었다면 신 부회장은 ‘거인’이 아닌 ‘대인’이라고 썼어야 옳았다.    

농협중앙회 최원병 회장은 더 심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에서 ‘빕니다’를 어처구니없게 ‘뵙니다’로 썼다.

교보생명 신용길 사장의 경우 글을 성의 없이 쓴 듯했다. ‘편히 잠드소서’를 ‘잠드스소’라고 썼다. 

그저 웃어넘길 수도 있다. 배울만큼 배운 회장님들이 정말 한글을 몰라 그랬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유명한 회장님들의 친필 문장을 볼 기회는 드물다. 하지만 안 봤으면 좋았을 뻔 했다. 회장님들은 평소 글을 쓸 기회가 거의 없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