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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단재 신채호 선생의 국적 회복은 뒤늦은 감이 있지만 후손들에게 의미있는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
지난 삼일절은 독립운동사에 새로운 한 획을 그은 의미 있는 날이었다. 정부는 3.1운동과 4.13 임시정부 수립 90돌을 맞아 “무호적 상태로 숨진 독립 운동가들에게 호적을 새로 만들어 전달한다”라고 밝혔다.
이로써 단재 신채호(신채호 1880~1936), 석주 이상룡, 여천 홍범도, 부재 이상설, 노은 김규식 선생 등 200여명의 독립운동가들이 가족관계등록부에 이름을 올린다.
이번의 정부 결정은 늦었지만 참으로 반갑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동안 구천을 떠돌았던 순국 영령들이 그나마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일이고, 통한의 세월을 살아온 후손들과 독립 운동가의 자손이라는 자긍 또한 심어 주게 되었다
이들 독립운동가들은 일제가 효율적인 식민지 통치를 위해 호적제도를 개편하자 "일제의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며 이를 거부했고, 거의가 광복을 보지 못하고 순국했다. 어렵사리 광복을 이루었으나 정부가 일제 때 호적을 유지하는 바람에 호적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지난해 대법원은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독립 운동가들의 이름이, ‘일제 때 정비된 호적에 올라있지 않다’고 해도 대한민국 국민이란 점은 명백하다"라고 밝혔다.
이에 보훈처가 "일제 때 사망한 독립운동가들의 '가족관계등록부' 창설이 가능하도록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의 개정 작업했고,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에 한해, 대법원 규칙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가족관계등록부를 창설할 수 있다'는 내용의 신설 조항 삽입과 함께 지난해 후반기에 입법예고 됐다.
그 무엇보다 이번 애국선열들의 국적회복의 일등공신은 단재선생의 며느리 이덕남(66)여사이다. 1967년 단재선생의 아들인 故 신수범과 결혼한 이 여사는, 70년대 초 첫 아이의 호적등재를 하다가 남편이 호적상 사생아로 등재되어 있음을 알고 기절초풍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훌륭한 분이시라더니 호적도 없다니…” 억장이 무너졌지만, “망연자실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라고 전한다.
80년 중반부터 이여사는 선생의 국적회복을 위해 남편과 함께 관계기관과 국회, 언론 등을 찾아다니며 불철주야 몸을 아끼지 않고 뛰어 다녔다. 그 과정에서 단재선생처럼 일제의 호적을 거부하다 광복 전 숨진, 호적도 국적도 없는 독립운동가가 300여명에 이른다는 사실도 알게 되면서, 여사의 발걸음은 더 빨라졌다.
사실 그동안 국회에서 여러 차례 ‘무국적 독립운동가’의 국적회복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법률 개정안이 발의 되었으나, 당시의 국회사정과 사회 상황에 따라 흐지부지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 여사는 단재선생의 국적회복 소식을 듣자 "호적을 받으면 바로 누워 계신 곳(충북 청원군)으로 뛰어 가겠습니다"라며 뛰는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한 언론은 전했다.
호적이 없었던 선생은 순국하여 통한의 망명생활을 마감하고 뼛가루가 되어 조국에 돌아 왔으나, 정작 한 몸 뉘일 곳이 없었다.
아래는'조선상고사'(원작 신채호 역자 박기봉 비봉출판사)권말 부록 ‘단재 신채호 연보’에서 단재선생의 순국직전의 상황을 부분 발췌 옮긴다.
1935년(56세).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형무소 당국에서는 맡아서 보호해 줄 사람이 있으면 출감시키겠다고 통고하였다. 이에 서울의 친지들이 선생의 옛 친구이자 일가벌이 되는 친일파 부호 한 사람의 보증 아래 가출옥을 종용하였으나, 선생은 친일파에게 몸을 맡길 수 없다며 단호히 이를 거절하였다.
1936년(57세). 2월 18일. 여순 감옥에서 뇌일혈로 의식불명 상태가 되자 급보에 접한 부인과 아들 수범, 친우 서세충이 여순으로 달려갔으나, 2월 21일(음 1월 28일) 오후 4시 20분, 유언 한 마디 남기지 못하고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향년 57세.
선생은 늘 “내가 죽으면 시체가 왜놈들 발끝에 체이지 않도록 화장하여 바다에 뿌려 달라”고 했으나, 후손들을 생각하여 국내에 묘를 쓰기로 하고, 여순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봉안해 왔다. 당시 국내의 각 신문에서는 순국하여 말없이 환국한 선생을 애도해 마지않았다.
유골은 충남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상당산 기슭 선생이 살던 옛집 터에 암장 되었다.민적(民籍)이 없었던 선생은 묘소허가를 받지 못하여 친척뻘 되는 면장의 묵인하에 암장했던 것인데, 이것이 발각되어 면장은 파면되고 말썽이 많았다.
선생은 살아 계실 때 “곡하고 노래하기 그마져도 어려워라”고 했지만, 죽어서도 정작 묻힐 곳이 없는 형편이었다.
묘소의 비갈(碑碣)은 만해 한용운이 돌을 캐고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이 '丹齋 申采浩之墓'라고 서각(書刻)하였다. 만해가 따로 비문을 쓰기도 했으나, 일경(日警)의 감시가 심하여 실현되지 못하고 묘비만 경부(畊夫) 신백우(申佰雨)가 몰래 갖고 가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