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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알 권리, 숨 불어넣었다" 백정연 소소한소통 대표

"모르는 건 당신 탓 아냐"… 근로계약서·재난문자, 그리고 시위 언어에 '권리'를 심다

김우람 기자 기자  2025.12.08 18: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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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 최근 지인의 장례식 조문을 앞두고 급하게 예절을 익히기 위해 유튜브를 검색했다. 상주에게 건넬 말부터 절하는 횟수까지, 모든 게 막막했기 때문이다. 검색 상단에 뜬 영상을 클릭했다. 영상 속 내레이션은 지나치게 느렸지만 정확했다. 급한 마음에 '대체 영상을 왜 이렇게 만들었지?'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화면 하단의 문구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소소한소통'. 발달장애인을 위한 쉬운 정보를 만드는 곳.

나에게 '답답함'으로 다가왔던 그 속도가, 누군가에게는 세상을 이해하는 유일한 '속도'였다는 사실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비장애인의 속도에 맞춰진 세상에서 나의 당연한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거대한 장벽임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지난 5일, 본지는 서울 모처에서 백정연 소소한소통 대표를 만났다. 그는 정보라는 장벽을 허물어 발달장애인의 '진짜 삶'을 복원하고 있었다.

법은 있는데 '도구'가 없다… 창업 이유

백 대표는 15년 넘게 사회복지 현장과 보건복지부 등 정책 영역을 오간 '통'이다. 그가 창업을 결심한 건 2015년경 '발달장애인법' 제정 과정에 참여하면서다. 법 제10조에는 '국가와 지자체는 발달장애인이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조항이 들어갔다.

그는 "법은 만들어졌는데, 정작 현장에는 이걸 수행할 전문 기관은 1곳이 있었다"라며 '누군가는 해야 한다면 내가 해보자'는 거창한 소명으로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정보가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선다고 강조했다. 백 대표는 "정보를 이해한다는 건 자기 효능감과 직결된다"라며 "내용을 알아야 스스로 결정할 수 있고, 그래야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는 주체적인 삶이 가능해진다"고 설명했다. 정보는 시혜가 아니라, 삶을 지탱하는 도구인 셈이라는 것.

'내습(來襲)'이 뭐야?…생존과 직결된 정보

백 대표가 꼽은 가장 시급한 분야는 '안전'이다. 그는 과거 태풍이 왔을 때 한 발달장애인 직원이 재난 문자를 보고 짜증을 냈던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문자에 '태풍 내습 시 외출 자제'라고 적혀 있었다 '내습'이라는 한자어는 비장애인도 잘 안 쓰는 말"이라며 "우리가 영문 기사를 볼 때 모르는 단어가 쏟아지면 읽기를 포기하듯, 발달장애인도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소소한소통은 이를 '태풍이 오면 밖으로 나가지 마세요'처럼 직관적인 언어로 바꾼다. 어려운 정보는 단순히 불편한 게 아니라, 누군가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근로계약서에도 적용된다. 노무사와 변호사의 자문을 거쳐 법적 효력을 갖추되, 어려운 법률 용어 대신 이해하기 쉬운 표현과 그림을 넣었다.

백 대표는 "근로계약서는 나를 보호하는 방패"라며 "당사자가 내용을 이해해야 자신의 권리를 지킬 수 있다"고 전했다.

투박한 시위 언어, 그럼에도 사회 관심은 필요하다

'쉬운 소통'에 대한 백 대표의 철학은 사회적 갈등을 바라보는 시선으로도 이어졌다. 그는 최근 출근길 지하철 시위 등으로 논란이 된 특정 장애인 단체의 방식에 대한 사회의 반응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투쟁방식의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 이른 아침 자신의 시간을 내어, 사람들의 비난을 들어가면서까지 그들이 투쟁하는 이유에 관심이 필요하다고 했다. 비장애인에게는 안전하고 빠른 지하철이라는 교통수단이 장애인에게는 그렇지 못해, 권리로 주장하는 장애인의 일상에 대한 관심 말이다. 

한편, 장애인이 주장하는 이런 상황에 대해, 장애인의 일상을 상상하지 못하는 다수의 비장애인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친절한 시위 메시지도 필요하다고 했다. 

백 대표는 "남편 역시 휠체어를 타는 척수 장애인이라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사회가 쳐다보지 않는다'는 그들의 절박함과 취지에는 공감한다"면서도 대중과 소통하는 언어와 방식의 아쉬움을 지적했다.

또 "예를 들어 탈시설 같은 용어는 대중에게 너무 어려운 표현"이라며 "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에서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삶의 이야기'인데, 어려운 용어와 다소 투박한 방식이 오히려 대중과의 소통을 가로막고 갈등을 키우지는 않나 생각돼 속상하다"고 토로했다. 

이어 "권리를 주장하는 방식과 언어 역시 시민들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쉬워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연애할 권리, 실패할 권리"… 삶의 반경을 넓히다

소소한소통은 정보 제작을 넘어 발달장애인 소개팅, 축구 클래스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직접 기획하며 경험의 반경을 넓히고 있다.

백 대표는 "연애를 글로만 배울 순 없다. 실제 소개팅 자리를 마련했더니 반응이 폭발적이었다"라며 "한 참가자 어머니는 아들과 함께 연애 책을 공부하며 다음 기회를 기다린다고 하셨다"고 전했다.

백 대표는 "비장애인도 연애에 실패하고, 이상한 신발을 사서 후회하기도 한다"며 "발달장애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실패할 기회조차 차단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문화 영역에서의 성과는 '전시 해설'에서 빛을 발했다. 서울시립미술관과 협업해 만든 '쉬운 해설'은 난해한 현대미술에 지친 비장애인 관람객들에게도 큰 호응을 얻었다. 

방탄소년단(BTS)의 RM이 소소한소통의 쉬운 정보를 의미하는 BI를 SNS에 인증하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정보의 문턱을 낮추니 장애인뿐만 아니라 어린이, 외국인, 어르신까지 모두가 편해진다는 '보편적 힘'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AI 기술로 도약…'경험 전문가'와 함께하는 미래

소소한소통은 사회적기업을 넘어 '테크'를 입고 있다. 최근 개발한 AI 기반 쉬운 정보 변환 서비스 '온글'이 그 무기다.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을 통해 AI가 쉬운 정보의 기준을 학습하게 했다. AI가 완벽한 쉬운 정보를 만드는 것은 어렵다. 그럼에도 더 많은 쉬운 정보를 빠르게 제공하기 위해 기술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백 대표의 다음 목표는 발달장애인을 '경험 전문가'로 채용하는 것이다. 정보가 쉬운지 어려운지 가장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 당사자의 경험을 전문성으로 인정하고, 동료로서 함께 일하는 회사를 꿈꾼다.

인터뷰를 마치며 백 대표는 우리 사회의 모든 정보 약자들에게 단호한 메시지를 남겼다.

"정보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어렵게 만든 정보 제공자의 책임입니다. 위축되지 마세요. 그리고 당당하게 요구하세요. '더 쉽게 알려달라'고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