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파사현정'(破邪顯正). 최근 교수신문이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다. 잘못된 것을 깨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는 뜻은 문재인 정부의 국정목표인 '적폐청산'과도 결이 같다. 정유년 대한민국을 관통한 시대정신이 사상초유의 대통령 탄핵과 장미대선을 통한 정권교체로 구체화된 한 가운데 가장 드라마틱한 변혁을 맞이한 곳이 바로 재계다.
잘못을 부수고 옳은 것을 드러내는 파사현정의 여정은 지난 정권 국정농단에 대한 단죄에서 출발한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요약되는 만큼 경제적 이권, 즉 정경유착은 사건의 핵심 한 축으로 꼽힌다.
◆국정농단 후폭풍…삼성·롯데 '구겨진 체면'
정체불명의 재단으로 재계 순위권의 총수들이 적게는 수억원, 많게는 수백억원을 헌납하고 정권의 사금고마냥 휘둘린 과정에서 '국민'과 '고객'은 없었다. 대한민국 1위 삼성의 후계자와 국내 최대 유통대기업 롯데의 총수가 구속됐거나 구속 위기에 몰린 상황에 여론의 동정론이 먹히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소문으로만 떠돌던 언론사와 대기업의 유착 관계가 적나라하게 까발려진 것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뇌물공여 재판 과정에서였다. 지난 8월 '시사IN' 주진우 기자가 공개한 장충기 전 미래전략실 사장의 휴대전화 문자메시지에는 삼성의 컨트롤타워를 이끌던 그와 주요 언론사 간부, 기자들 사이에 오간 낯 뜨거운 언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일례로 문화일보 A간부는 "사장님 식사는 맛있게 하셨는지요"라는 안부 인사와 함께 "올 들어 문화일보에 대한 삼성 협찬+광고 지원액이 작년대비 1.6억이 빠지는데 8월 협찬액을 작년(7억)대비 1억 플러스 할 수 있도록(중략) 사장님께서 관심 갖고 챙겨봐 주십시오. 앞으로 좋은 기사, 좋은 지면으로 보답하겠습니다"라고 보냈다.
서울경제 출신의 한 인사는 "사외이사 한 자리 부탁드린다"며 노골적인 청탁을 했는가 하면, CBS 지방취재본부 임원은 극도의 존칭을 써가며 아들의 채용합격을 부탁했다. 연합뉴스와 매일경제 소속 기자들은 각각 이건희 회장의 성매매 의혹과 신라면세점 관련 기사청탁을 두고 장 전 사장 앞에 머리를 숙였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의 중국 국빈방문 당시 기자단 집단폭행 사건과 관련해 국내 누리꾼들이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 것도 이를 지켜 본 대중이 받은 충격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롯데 역시 삼성만큼이나 박근혜 정권과의 악연이 두드러졌다. 네이처리퍼블릭 정운호 대표에서 시작된 이른바 '법조게이트'에 휘말리며 면세점 입점 로비 정황이 포착된 신영자 전 롯데쇼핑 사장은 70대 중반의 노령에도 구속을 못 피했다.
그룹총수인 신동빈 회장은 경영비리 관련 1750억원대 횡령·배임혐의로 지난 10월 검찰로부터 징역 10년, 벌금 1000억원이 구형됐고 이와 별개로 박 전 대통령과 직결된 뇌물공여 혐의로도 재판에 넘겨졌다. 박영수 특검과 검찰은 여기서도 재판부에 징역 4년, 추징금 75억원의 중형 선고를 요청해 실제 법정 구속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프랜차이즈 '갑질'과의 전쟁
올해는 유독 프랜차이즈 브랜드의 수난이 겹쳤다. 정우현 MP그룹 회장의 폭행사건으로 불거졌던 논란은 미스터피자 가맹점주에 대한 보복출점과 각종 갑질 폭로로 번지며 브랜드 자체가 존폐 위기까지 몰렸고, 호식이두마리치킨 역시 최호식 회장의 성추문 사건을 도화선으로 매출 급감에 시달렸다.
국내 1위 치킨프랜차이즈는 BBQ는 가격 꼼수인상과 광고비 부당전가 의혹으로 곤욕을 겪었고 최근 경쟁업체에 대한 비방글을 사주했다는 주장과 윤홍근 회장에게 폭언을 들었다는 가맹점주의 폭로가 양측의 진실공방으로 번지며 이미지에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제빵사 불법파견을 둘러싼 프랜차이즈 제과업계 1위인 파리바게뜨와 고용노동부의 신경전은 정부 차원의 사회적 이슈가 됐다.
정의당의 문제제기로 지난 국정감사에서도 뜨거운 감자였던 파리바게뜨는 제3자 합작사 설립을 통해 우회적으로 직고용 부담을 줄이고자 했지만 '비정규직 보호'에 방점을 둔 정부는 과거보다 강경한 법적·행정적 대응을 준비 중이다.
◆"성공한 로비는 없었다" 착한기업 전성시대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를 필두로 과거 친정부적 판단에 대한 재심 결정이 잇따르는 것 또한 올해 재계를 뒤흔든 주요 이슈다. 이른바 '성공한 로비'를 관행으로 인정하던 과거와 달리 과정이 불공정했다면 결과가 뒤집힐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대표적인 것은 공정위의 '순환출자 가이드라인 변경'이다. 김상조 공정위원장은 21일 브리핑을 열고 "2015년 12월24일 발표한 합병 관련 신규 순환출자 금지제도 법집행 가이드라인을 변경하기로 했다"고 선언했다.
해당 가이드라인이 삼성그룹의 로비를 통해 기업에 유리하도록 왜곡됐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이를 바로잡겠다는 것이다. 앞서 이재용 부회장에게 유죄를 선고한 1심 재판부는 공정위의 합병 가이드라인이 삼성 미래전략실의 로비 결과라고 적시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삼성SDI가 순환출자 규제를 피하기 위해서는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확보한 삼성물산 주식 가운데 404만주(약 5000억원 상당)를 추가로 처분해야 한다.
수많은 희생자를 낸 가습기 살균제 참사 가해업체에 대한 면죄부도 대거 거둬들여질 전망이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처리 평가 태스크포스'(이하 TF)는 지난 20일 공정위가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처리한 관련 사건처리 과정을 면밀히 조사한 결과 지난해 심의절차 종료로 의결한 가습기 살균제 표시·광고사건의 처리과정에서 실체적, 절차적 잘못이 있었다며 공정위에 유감표명 및 재심의 착수를 권고했다.
문제의 사건은 지난해 4월 CMIT·MIT 성분으로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한 SK케미칼 및 유통사인 애경에 대해 표시·광고법 위반 신고가 접수된 것에서 시작됐다.
당시 공정위 서울사무소는 해당 제품 라벨 어디에도 주성분명과 주성분이 독성물질임을 표시하지 않은데다 이를 은폐·누락한 혐의가 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소위원회에서 돌연 "사실관계 확인이 곤란해 법위반 여부 판단이 불가능하다"며 흐지부지됐고 두 업체는 면죄부를 받았다.
로비와 꼼수로 얼룩진 재계를 향해 비판이 쏟아진 반면 '착한기업'에 대한 여론의 환호가 집중된 한해기도 했다. 대표주자는 일명 '갓뚜기'라는 애칭을 얻은 오뚜기다.
지난 7월 문재인 대통령의 청와대 만찬에 중견기업으로서는 드물게 자리를 함께한 오뚜기는 오너일가의 투명한 상속세 납부와 비정규직 없는 고용문화, 10년째 주요제품 가격동결 등이 화제가 되며 칭송이 쏟아졌다.
물론 일부 계열사의 일감몰아주기, 복잡한 순환출자 고리 등이 문제로 지적됐지만 정경유착의 상처가 큰 대중에게 오뚜기의 선전은 일종의 위로였다. 여기에 지역 친화형 중소기업과 상생경영을 앞세운 기업들이 때마다 청와대 행사에 이름을 올리면서 상당한 마케팅 효과를 거둔 것도 눈길을 끌었다.
파사현정의 정유년을 보낸 재계가 상처를 딛고 무술년 환골탈태의 기적을 선보일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