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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철의 여정] 노예의 길과 주인의 길

정보철 칼럼니스트 기자  2016.07.19 08:5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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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중학생 셋이 파출소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몸은 왜소하고 여린 얼굴이었다. 난 겁에 질린 아이들의 얼굴을 보며 경찰에게 상황 설명을 했다.
다소 흥분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 중학생들은 초등학생의 돈을 빼앗아간 학생들이라는 것을,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내가 이들을 붙잡았다고 얘기했다. 그리고는 냉정한 얼굴로 아이들을 힐끗 바라보았다.

10여 년 전의 일이다. 나는 아직도 그날의 내 모습을 기억한다. 다소 과장된 얼굴로 조금은 뻐기는 태도로 그리고는 이내 무표정한 모습으로 돌아간 나의 얼굴을 뚜렷이 기억한다. 그 얼굴이 너무도 싫지만 잊을 수는 없다. 평생 지워지지 않을 지도, 아니 스스로 지우지 않을지도 모른다.

삶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과거를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삶 그것은 노예의 길이고, 과거를 기억하고 싶은 삶 그것은 주인의 길이다.

우리는 자신의 삶이 주인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 노예의 삶일 지도 모른다는 의문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찌하랴. 주인의 삶에 반대되는 노예의 삶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을 어찌할 것인가.

주인의 삶과 노예의 삶의 갈림길에는 단 한 가지 표지판만이 놓여있다. 그것은 의존이라는 단어이다. 그 무엇에 의존하느냐, 의존하지 않느냐가 삶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다. 의존하는 그 무엇의 범주가 좁을수록 노예의 삶이고, 그 무엇의 범주가 넓을수록 주인의 삶이다.

의존은 두 가지 점에서 얘기할 수 있다. 첫째는 그 무엇에 영향을 받는 것을 말한다. 영향 받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독립성의 상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독립성의 상실은 주체로서의 자신을 포기하는 것을 말한다.

주체의 포기는 존엄성의 상실과 다름 아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자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에 훼손이 생기는 것이다. 존엄성의 상실은 인간존재로서 가장 비참한 일이다.

둘째는 내가 무력하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어떤 일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은 굴욕에 그대로 노출돼 있다, 물론 굴욕이 항상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무엇이, 혹은 타인이 그에게 선처를 하지 않는 한 그는 굴욕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살불살조(殺佛殺祖).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섬뜩한 뜻을 지닌 이 말은 1968년 일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노벨상 시상식장을 발칵 뒤집어놓은 말로 유명해졌다. 서양인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난해한 말이다.

이 말을 한 사람은 9세기경 중국 당나라 말기 고승인 임제 선사. 도를 닦는 중의 입에서 부처를 죽이라는 말은 서양인의 입장에서는 기독교인이 예수를 죽이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이니, 어찌 서양인들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철학의 맥을 같이하는 동양인의 입장에서도 난해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해가 어려운 만큼 이 말이 주는 충격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력하다.

요지는 한 가지로 귀결된다.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무엇에는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스승과 부모가 포함된다. 자신의 삶을 주인으로서 살아가려면 소중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쳐낼 수 있는 결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살불살조의 정신이다.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면 소중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은 자신의 삶에서 하나의 정거장일 따름이다. 목적지가 아니라는 말이다. 잠시 쉬면서 정비를 해야 할 필요성만이 남아 있는 정거장이다.

우리는 정거장에 머물려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니다. 가야 할 길은 아직 멀었다. 시간이 되면 정거장을 서둘러 떠나야 한다. 떠나지 못하면 우리의 삶은 정체된다. 정체는 박제된 삶이다, 이대로 머물다가 허공 속으로 산산이 부서져 사라져갈 따름이다,

살불살조는 삶을 생생하게 살아가는 자들의, 주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의 근본원칙이다. 살불살조의 정신이 삶의 모든 곳에 뿌리를 내리면 내릴수록 우리는 주인의 삶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주인의 삶은 품격 있는 자들의 삶이다.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족하다 해도 그 무엇에 예속돼 있는 노예의 삶이 품격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허나 주인의 길은 험난하다. 품격을 지키기 위해서는 커다란 대가가 필요하다. 그 무엇을 소중하다고 여기는 순간 그것을 버릴 줄 아는 용기가 있어야 하고, 난관에 봉착할 때 그 무엇에 의존하고 싶은 마음을 수시로 가다듬어야 한다.

살불살조, 그 무엇에 대한 의존을 버린다는 말은 부처와 조사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시야를 넓게 가져가 보자, 삶의 현장 곳곳에 스며든 모든 부와 권력, 권위 그리고 우리들의 모든 욕망과 관습에도 해당된다.

특히 부와 권력, 권위 등 사회적 힘에의 의존은 우리를 굴욕적인 삶, 노예의 길로 이끌고 개인적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우리를 알게 모르게 강박적인 삶, 노예의 길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주인의 길에는 자유가 있고, 노에의 길에는 의존이 있다. 자유와 의존 사이의 간격에는 영향이라는 영역이 있다. 우리는 영향의 범주를 과소평가하는 버릇이 있다. 영향의 영역은 좁을수록, 그리고 그 기간이 짧을수록 좋다. 의존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 무엇에 영향을 받는 것과 주는 것에 대한 예리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영향의 영역이 삶의 여정에서 소중한 것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유이다. 영향을 받는 영역만큼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자유는 인간 존재의 궁극적인 가치이다. 자유보다 더 높은 이상은 없다. 인류역사는 자유를 획득해가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전쟁과 혁명은 특히 자유를 놓고 벌어지는 역사의 현장이다.

자유로운 삶, 그것은 주인의 길이다. 의존의 삶, 그것은 노예의 길이다. 허나 우리는 그 갈림길에서 잠시 머뭇거린다. 어디로 갈지 모르겠다는 것은 순박한 고민일 것이다.

주인의 길이 어느 길인지 알면서도 노예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타인에게 의존하는 삶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작은 이기심의 발로이다. 이기심은 책망할 그 무엇이 아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닌 한 이러한 선택을 저지해서는 안 된다.

허나 존재로서의 삶을 살아가려는 우리는 주인의 길을 선택하는데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 독립과 주체, 자아존중심으로 엮어지는 주인의 길을 두고 하는 말이다. 무력감과 굴욕,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든 무력감과 굴욕, 예속으로 이어지는 노예의 길을 당당히 거부해야 한다.

다시 한 번 의존의 영역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돈의 노예가 되지는 않았는지. 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하지 않았는지. 관습의 희생양이 되지는 않았는지.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았는지. 여기서 특히 문제되는 영역은 욕망과 관습의 영역이다.

부와 권력에 의존하는 삶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비난을 하지만 욕망과 습관에 휘둘리는 삶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비판의 소리가 적은 탓에 대부분 문제의 심각성을 잘 모르고 지나가기 마련이다.

욕망과 관습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삶은 생생하지 못하다. 박제된 삶이나 마찬가지이다. 박제된 삶에는 자유가 날아다닐 수 없다.

앞서 얘기한 10여 년 전 파출소 장면은 필자가 노예의 삶을 걷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주체로서의 독립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의존이라는 측면에서 하는 말이다.

그 장면을 복기해보자. 중학생들은 한순간의 실수로 초등학생의 돈을 빼앗았다. 난 초등학생의 부모로서 그들을 붙잡아 파출소로 넘겼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후의 장면이 문제이다.

중학생들은 겁에 질렸었다. 다음 날 학교로 통보하겠다고 한 경찰의 말에 사색이 퍼랬다. 이때 나는 그들을 진정으로 용서하고, 아이들의 손을 잡았어야 했다. 그리고 경찰에게 학교에 통보하지 말라고 당부했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를 못했다. 경찰의 말에 동의했고, 겁에 질린 아이들을 힐긋 쳐다보며 파출소를 나왔다. 주동자 아이의 휑한 얼굴에 공포에 떠는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아이는 부모가 없는지 20대의 어린 누이가 와서 데려갔다, 지금도 마음이 몹시 아픈 대목이다.

난 그들을 왜 진정으로 용서하지 못했을까. 그것은 필자의 마음이 모질어서가 아니었다. 차라리 모질었다면 차라리 나을 뻔 했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가 관습에 의존했다는 것이다. 비행청소년이라고 단정 지은 것이 첫 번째 관습적인 판단이고, 그들을 용서하지 못하고 학교에 통보하는 관례에 동의한 것이 두 번째 관습적인 판단이었다. 이 대목에서 전혀 필자의 생각이 들어있지 않았다.

내가 좀 더 예민했더라면 정황상 그들이 단지 실수한 것이고, 그 실수를 눈감고 오히려 손을 잡아 줬었을 것이다.

파출소 안에서 아이들의 부모들이 오기까지 1시간가량 같이 있었다. 10여평 내외의 파출소 공간에서 1시간이라는 시간은 충분히 그들의 영혼과 교감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스스로 내 영혼의 귀를 닫아버렸다.

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아이의 영혼은 필자에게 수없이 말을 걸어왔다. 고통과 용서에 대해서. 그리고 10여 년이 지나서야 나는 이제 겨우 응답한다. "오히려 내가 용서를 구한다고."

나는 이제라도 노예의 영역에서 벗어나 주인의 길을 걸어야 한다. 그 시발점은 10여 년 전 그 우울한 파출소 삽화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 길이 관습으로 굳어진, 관습에 의존하는 사고와 행동으로 어그러진 길에서 벗어나는 비상구이다.

그 길은 또한 감정과 욕망, 돈과 명예, 권력에 의존하지 않고, 폭력에 굴복하지 않는 길로 이어지는 탈출구이다. 탈출은 살부살조의 정신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품격 있는 삶 또한 가능할 것이다.

정보철 칼럼니스트·이니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