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사 조종사노조의 파업과 관련, 노사간 자율교섭 여지가 충분히 남아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다시 되풀이됐다.
지난 7월 아시아나항공 파업에 이어 정부는 지난 8일 대한항공 조종사노조의 파업에도 긴급조정권을 발동해 파업을 중단시켰다.
긴급조정권이란 노동자들이 단체행동권을 지나치게 행사한다고 판단될 경우 정부가 이를 제한할 수 있는 권리로 노조 쟁의를 30일간 금지할 수 있는 조치다.
문제는 지난 63년에 도입돼 이후 2번밖에 발동되지 않았던 ‘긴급조정권’이 올 여름 아시아나의 조종사 노조 파업 사태에 도입되더니, 불과 다섯 달 만에 또다시 그 위용을 우렁차게 드러내 노사간 자율교섭의 여지와 통로를 차단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당사자인 대한항공 조종사노조를 비롯해 노동계와 진보진영이 한 목소리로 노무현 정부의 ‘긴급조정권 남발’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현재 위헌시비가 있음에 따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적용해야 할 긴급조정권이라는 공권력을 함부로 남발하는 사태가 올해 들어 두 번이나 연타로 발동되는 것은, 누가 뭐래도 일개 장관이 ‘자의적으로’ 긴급조정권을 발동할 수 있는 권력을 쥐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긴급조정권 발동을 노동부장관에서 대통령으로 격상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쏟아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조정권 발동 여부가 노동부 장관의 ‘주관적 판단’에 맡겨져 있기 때문에 결국 장관이 발동요건인 ‘국민경제에 심각한 피해가 우려되는 상황’이라고 멋대로 판단을 내릴 경우 노사협상이 자율적으로 타결될 가능성이 충분히 열려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거리낌 없이 악용된다는 소리다.
물론 정부가 주장하는대로 “대한항공의 파업이 장기화되면 국민경제에 미치는 피해가 막대할 것으로 예상됐다”는 말은 수긍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임금인상이라는 단일사안이었다.
경제적 손실에 대한 아시아나와 대한항공의 비교를 떠나 파업은 겨우 나흘째. 파업이 장기화될수록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도 노사가 서로 인식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가정이지만, 긴급조정권이라는 시대착오적인 제도만 존재하지 않았고 이에 따라 서로 조금씩 양보만 했다면 쉽게 마무리를 지을 수 있는 사안이었다.
그러나 사측은 노조측의 거듭된 수정안을 거부했다. 아시아나 파업 때도 긴급조정권 발동을 통해 항공사측의 손을 들어줬던 노동부가 이번에도 항공사라는 사용자측의 손을 힘껏 들어주길 대한항공이 내심 바라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이 때문에 제기되고 있다.
실제 정부는 대한항공이 총파업에 돌입하기 전부터 “긴급조정권을 발동하겠다”고 엄포까지 놨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노조는 이 눈치 저 눈치를 다 봐야 되고, 회사는 기세등등할 수밖에.
긴급조정권은 ‘(쟁의행위를 통해) 준전시에 해당하거나 국가 비상사태에 준하는 위급한 상황’에서만 행사돼야 한다는 게 노동계의 정석이다.
대한항공측은 파업에 따른 추정 손실액(여객 12만9000명, 화물 9700톤)이 670억원에 이른다고 주장했지만 운항을 직접 담당하며 항공업의 속내를 잘 아는 조종사들은 오히려 “파업을 통해 회사는 적자노선부터 감편, 회사의 손익은 파업으로 오히려 나아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누구의 주장이 옳고 그르냐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라, 대한항공 조종사노조의 파업은 긴급조정권 발동에 해당사항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해찬 국무총리도 지난 12일 “긴급조정권은 불가피하게 사용돼야지 노무관리 차원에서 사용돼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긴급조정권은 노사 자율 교섭의 틀을 무너뜨리는 것을 넘어서 노동기본권을 침해하는 행위다. 긴급조정권을 발동한 뒤 대한항공은 파업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심각한 노사갈등을 겪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사면초가에 빠졌던 노동부의 입장도 물론 이해할 수 있다. 노조라면 치를 떠는 국민여론도 무시할 수 없었을테고, 노조라면 자다가도 고개를 돌리는 재계측의 눈치를 안볼 수 없으니 말이다.
어쨌든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중노위의 조정을 떠나, 노사 양측이 허심탄회하게 재협상을 벌여 임금협상을 조속히 끝내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