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1991년 문화방송에서 최수종, 이응경 주연으로 각색, 방영돼 인기를 끌기도 했던 ‘행복어 사전’의 제1장은 오히려 ‘모든 행복의 조건을 거부하라’고 말한다. 상당히 역설적이다. 원작 소설을 지은 이병주가 갑부의 아들로 와세다대와 메이지대에서 수학한 데다 당시로서는 세련된(이 평가는 지금은 고인이 된 이영희 전 한양대 교수의 회고록에서 나온 표현임) 소설이었던 ‘소설 알렉산드리아’로 데뷔를 한 점에서 비춰보면 더 그렇다.
하지만 그의 필생을 추모하는 많은 이들로부터 상당히 남성적이고 역동적인 문체의 소유자라는 평가를 들었다는 점이나, 부산 ‘국제신보’ 주필로 냉철한 언론 스타일의 글을 오래 써 온 점, 지리산 빨치산 활동 이력 등에서 보면 이런 역설을 첫머리에 앉힌 점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행복이라는 것을 논하려면, 불행을 정확히 알아야 하고 더 나아가 행복어 사전을 편찬할 정도로 행복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할 사람은 오히려 불행을 더 정확히 알고 가까이 끼고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오히려 이렇게 불행을 선택하면 더 이상 두려움이 없다는 듯한 자락을 깔고 시작하면서, 이 소설에서 “불행이란 무엇인가?”→“행복의 반대”→“불행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행복을 만들어야지”→“어떻게?”→“행복어 사전(辭典)을 만드는 거다”라는 말장난이 단순한 말장난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청춘 남녀가 행복을 내건 간접화법으로 사랑을 타진하는 장면이며, 미완으로 끝나지만 행복어사전이라는 것을 찾는 노력이 의미를 갖게끔 전제 조건을 깔아주는 셈이다.
자료를 읽자니, 지난해보다 경제적으로 덜 행복하다고 느끼는 가구가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한다. 12일 삼성경제연구소가 내놓은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올해 4·4분기 경제행복도 지수는 46.7로 작년 같은 기간 48.0보다 소폭 하락했다. 내년 이맘 때의 경제적 행복감을 예측하는 예상지수도 작년 4분기(52.7)보다 소폭 하락했는데(51.7), 체감지수와 예상지수가 모두 떨어진 것은 설문조사 시작 이후 처음이라고 알려져 조금 충격적으로 받아들일 분도 계실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행복도 체감지수도, 앞으로의 예상 행복도지수도 동반 하락하는 상황은 어쩌면 일찍부터 예견돼 있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2009년을 특정해 보자. 국제 금융위기가 닥친 2008년을 갓 넘긴 뒤 이때 신문기사들을 보면 ‘불황 속 과소비’라는 검색어로만 찾아봐도 몇 가지 뉴스가 검색될 정도다.
문제는 또 있다. 지난 11월에 나온 LG경제연구원의 김형주 연구위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009년 상반기에 42.1%에 머물던 ‘주택구입 이외’ 목적의 주택담보대출 비중이 올해 상반기에는 48.4%로 상승했다”고 한다.
김 연구위원은 특히 이런 추세는 저소득층에서 두드러졌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실제로 지난 2010년부터 2011년 상반기까지 증가한 가계대출 중에서 연소득 2000만원 미만 계층의 비중이 37%로 가장 높고 연소득 6000만원 이상의 비중은 3%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2009년부터 경기가 좀 풀리나 하니(혹은 10년만에 재림한 위기에 더 이상 쓸 여윳돈이 없자) 당장 먹기엔 곶감이 달다고, 집을 담보로 야금야금 빼어서 가계 자금을 충당했다는 셈이다. 그리고 거친 연결이지만, 2009년부터 되짚어 볼 적에 각 금융기관들은 (주택구입 목적 외의) 주택담보대출 영업 경쟁에 나섰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미 2009년 상반기에 40%를 넘긴 구입 외 타목적 주택담보대출이라는 기반 지표가 있었던 점에 주목해야 한다. 경제를 연구하거나 정책을 기안, 집행하는 쪽 혹은 금융업 실무를 오래 한 이들 중 적어도 일부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주택담보대출의 영업에 내남없이 가담하면 어떤 결과가 금년쯤에 닥칠지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와중에 금리를 급히 위쪽으로 움직이기엔 이미 빚이 많다는 논리나 (부동산을 지렛대로 사용한) 경기 부양을 위해서라는 명분 하에 이런 문제를 알고도 틀린 것은 아닌가? 물론 사람이기 때문에, 또 부존자원 없이 무역으로 먹고 사는 궁색한 경제를 꾸려 나가기엔 선택지가 좁을 수밖에 없기에 더러 알고도 틀릴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알고도 틀릴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저러한 정책적 고뇌에서 나온 게 아니라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움직인 끝에 나온 부산물에 불과하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결국은 금융위기 여파를 막는 와중에 너무 일찍 극복이라든지, 회복 같은 단어를 꺼내들었고 정책적으로나 금융실무상으로나 뒷수습이나 나중의 일을 생각하지 않았던 게 아닌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게 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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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불행하지만’이라는 현재 위치를 정립하지 않은 상황에서 만드는 단어·숙어의 나열은 두고두고 읽힐 사전이 아니라 결국 잠시 후 깨어날 수밖에 없는 SF소설에 다름 없으며, 이번 행복관련 지수의 동반 하락을 경고하는 삼성경제연구소의 조사 결과는 그래서 의미가 있는 경고음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