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촉한의 제갈량은 재사이기도 하지만 충신으로 각인돼 있는데, 이런 이미지를 완성하는 점정은 영안 탁고(永安 託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촉한의 유비는 영안에서 임종하기 직전 내린 ‘탁고’를 통해 “만일 후계자(유선)가 보좌할 만한 사람이면 보좌하고, 그가 재능이 없다면 당신이 스스로 취하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온 힘을 다해 충정의 절개를 바치며 죽을 때까지 이어 가겠다고 답해 후주대에 멸망할 때까지 유씨 집안에 의해 촉한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 유비의 발언을 고도의 정치적 견제구이자 어쩔 수 없이 제갈량이 선양을 사양하게 만든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미담임에는 틀림없다.
삼국시대의 또 다른 주요 등장인물인 조조의 경우도 이러한 욕심의 절제를 잘 보여준 인물로 보인다. 소설가 이문열은 경향신문에 연재하던 평역삼국지를 통해(1987년 1월7일) 조조를 “오랜 세월 실권을 잡고 있었으면서도 제실의 권위에 직접 도전하는 법이 없었고, 또 부득이 손을 대도 천자를 해치지는 않았다”고 평하면서 ‘정통성이 가지는 힘을 의식한 행동’이라고 평했다.
그럼에도 조조는 간웅의 대표쯤으로 낙인이 찍혀 있는데, 이는 정사 삼국지가 아닌 연의류 이야기에서 ‘나대는 행보’가 묘사돼 전해져 왔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헌제를 시해하지는 않았고, 실무정치가로서 훌륭한 행보를 보였다고는 해도, 사냥대회에서 황제인 헌제를 무시했느니 한 것이 그런 부분이다. 사냥대회에서 조조가 헌제 대신 백관들의 환호를 받고 손을 들어올리는 등 교만을 떨었다거나, 황제의 활을 대신 차지했다 하고, 관우는 이를 보고 조조를 살해하려 했지만 유비가 말렸다고 한다. 설움을 참다 못한 헌제가 동승에게 밀지가 담긴 허리띠를 하사해 조조 제거를 명령하였다고 한다든지 하는 부분도 그러하다.
정사에는 허리띠 밀서나 사냥대회에서의 능멸은 없다 하니 진위 문제는 차치하겠지만(사냥대회에 관한 부분은 ‘촉서’에 적힌 ‘관장마황조전’에 주석으로 적혀 있다고 하나 내용을 보면 헌제가 사냥에 동행했다는 기록은 없다 한다), 일단 수많은 공로와 정통성을 나름대로 존중한 모든 일이, 사소하다면 사소한 일 하나로도 상쇄되고 마는 것이다(관우가 보기엔 ‘베어 죽일 역도놈’이 된다).
실로 속마음을 숨기지 못한 마지막 일화 하나로 충신과 간웅이 갈리니, 행동의 무게가 이와 같다.
근자에, 오랜 역사를 이어온 사학 연세대학교가 이사회 변질 문제로 시끄럽다 한다.
연세대는 1915년 3월 미국 북장로교의 협조와 미국 남·북 감리교, 캐나다 장로교의 협력으로 출발한 한반도 최초 교단연합 기독교교육기관이다.
그런데, 근래에 건학 배경에 따라 여러 교단에서 이사를 파송받기로 돼 있던 오랜 전통을 일거에(주장하는 측에 따라서는 절차가 무시됐다고도 함) 변경하여 일반인 이사의 입김이 커지게 했다고 한다. 교계에서는 설립자인 호러스 언더우드 목사의 건학 배경에 따라 1957년 1월 연세대 정관 제24조 ‘임원선거 방식’에 대한예수교장로회, 기독교대한감리회, 한국기독교장로회와 대한성공회 등 4개 교단 파송이사 4명과 협력교단 교계 인사 2명을 선임하도록 명시했는데 이를 현재에 이르러 임의로 변경한 것은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일각에서는 절차 무시 논란 등 무리수를 둔 이유가 현 재단 이사장인 조선일보 방우영 명예회장의 학교 사유화를 위한 포석이 아니냐는 기우마저 내놓고 있다.
생각해 보면, 세칭 명문대 중에 언론이나 기업과 인연을 맺고 있는 경우나 경우에 따라서는 특정인의 소유처럼 인식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고려대는 지난 1929년 호남재벌 김성수씨에 의해 설립된 재단법인 중앙학원이 보성전문을 인수해 이후 김씨 후손과 연이 깊은 동아일보와 특수관계로 얽혀 있다. 오늘날 ‘삼성 대학’인 성균관대의 경우도 삼성 재단이 철수한 이래 봉명그룹이 지원을 했지만 이후 전격적으로 손을 떼 1990년대 초중반 학교가 어려움을 겪은 바 있다. 다시 성대에 삼성 재단이 들어와 재도약을 하고 있다. 국민대는 과거 쌍용 재단이 기틀을 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연세대의 경우와 방씨 집안, 조선일보의 경우는 이런 전례와는 좀 다르다.
오랜 시간 주인 없는 대학으로 대과 없는 경영을 해 온 데다, 장로파 뿌리임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언급한 애큐메니컬 정신에 따라 초종파적인 학교 운영을 해 기독교 대학이면서도 폐쇄적이지 않은 학풍을 자랑해 왔기 때문이다.
물론 방 명예회장이 오랜 세월 동창회장으로 공로를 세운 바 있고, 이런 점이 이사장으로 소명을 받은 기반임은 널리 인정되는 바이다(조선일보에 상당히 비판적인 한겨레신문의 경우도 이사장 선임 기사에서 이런 점을 가감 없이 소개하고 있다. 기사의 예는 1997년 2월1일자 28면). 하지만 동아일보와 고려대의 특수한 관계와 닮은 연세-조선 사례를 만들 생각을 누군가 할 계기로 방 명예회장의 공적 부피를 재자면 그 비중 대비가 좀 약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위에서 학교 사유화 운운하는 걱정이 나오는 일은 기우이자 모함밖에는 안 된다고 볼 수밖에 없다.
여러 논란은 차제에 언급하자. 하지만 연희를 세운 언더우드 목사와 세브란스를 세운 에비슨 선교사가 두 분 모두 교단과 교파를 초월해 애큐메니컬 정신을 몸으로 보여 줬으며, 언더우드 일가가 스스로 기득권을 포기하고 아름다운 퇴장을 하기도 했으며 주인이 없는 학교로서 이만한 세칭 명문대로 살아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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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사유화 논란이 있는 자체가 오해이자 누명이겠지만, 이런 의구심을 일말이라도 자아내는 행보가 있었다고 보는 이들이나 구설에 오르내리는 이는 지금 연세-조선일보 관계가 사냥대회에서 헌제와 조조의 관계에 가까운 것인가, 양안 탁고의 유비와 제갈량에 가까운가에 가늠해 보면, 그리고 어느 쪽이 바람직한지를 생각해 보면 답과 처방이 나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