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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르포] 한국금융시장의 데칼코마니 ‘싱가포르 금융허브’①

‘완성형 공산주의, 독재 자본주의’ 그곳의 첨단금융 스킬은…

싱가포르=정금철 기자 기자  2011.11.22 09:5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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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투자증권과 한국투자증권이 위치한 래플스플레이스빌딩에서 내려다본 싱가포르 래플스시티 전경.
[프라임경제] 우리나라와 1975년 8월 처음으로 교류를 이룬 동남아시아 말레이반도 끝단 도서국가. 서울 면적(605.25㎢)과 큰 차이가 없는 710㎢ 정도의 면적에 불과하지만 말라카 해협의 천혜 자연조건을 극대로 살려 전 세계 교통과 물류, 금융의 허브로 자리매김한 나라이자 자본력을 갖춘 이민자들의 천국으로 다민족, 다종교가 적절한 균형을 이룬 한국의 우호협력국. 이상의 간략한 설명으로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국가는 싱가포르뿐이다.

며칠을 겪어본 싱가포르는 우리의 예상과는 다소 다른 구석이 있었다. 한국과 닮았으면서도 명백히 대치되는 행정력을 가진 그곳은 우리 금융시장의 데칼코마니로 묘사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노동쟁의 없이 완성형에 가까운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독재 자본주의 국가로 뇌리에 새겨진 싱가포르에서 현지 금융시장을 아우르는 한국 증권전문가들을 만나 봤다.

그들은 싱가포르 내에서도 중심업무지구(CBD)로 분류, 싱가포르 금융의 핵심으로 전 세계의 은행, 증권, 보험사 등의 아시아 본부가 위치해 허브의 핵심을 자처하는 래플스 플레이스(Raffles Place)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전세계 금융전문가들이 가벼운 정장차림으로 좁고 긴 가로수 길을 누비는, 목을 뻐근하게 하는 마천루가 즐비하지만 누구 하나 위를 올려다보지 않는 시크한 거리 ‘래플스 플레이스’에서 만난 그들은 한국 금융시장의 위상을 높이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들은 어떻게 세계금융을 품었을까 

익히 알려진 대로 싱가포르는 홍콩과 더불어 아시아 시장의 대표적 금융허브로 기능하고 있다. 무역, 금융 등 서비스산업은 싱가포르 경제에서 70%가량의 비중을 차지하며 현지 경제를 주도하고 있다.

1960년대 후반 싱가포르 정부가 경제·정책적 전략으로 금융산업 육성을 주창한 것이 금융허브의 태동이 됐고 이후 1998년 금융당국이 금융산업 규제를 과감히 완화한 대대적 금융개혁정책을 펼쳐 현재 글로벌 금융허브의 모습을 갖췄다.

그러나 싱가포르가 금융산업에 치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싱가포르의 경우 금융시스템과 행정시스템 등 자국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를 제외하면 자기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농수산물 등 식자재는 물론이거니와 도시기반을 구축하는 인력까지 막강한 자금력을 근간으로 타국에서 전량 들여오고 있다. 

   
싱가포르 분탓 스트리트(Boon Tat St)에 위치한 싱가포르거래소(SGX)의 외관.
이렇듯 대외 의존도가 높은 싱가포르는 대외적 돌발 변수에 대항하고자 금융산업 육성에 초점을 맞추고 국부 증대를 위한 노력을 지속해 왔고 장기간에 걸쳐 테마섹과 GIC 등 양대 국부펀드를 조성했다.

1974년 싱가포르 정부가 출자한 테마섹은 싱가포르 대표기업에 투자해 국가기간산업을 보호키 위한 방어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1981년 설립된 GIC는 외환보유액 등 국가 여유자금의 확대를 위해 공격적인 운용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런 전략은 테마섹과 GIC를 세계 10대 국부펀드 중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글로벌 마켓에서 위용을 떨칠 수 있는 수준으로 성장시켰고 이에 따라 싱가포르의 국제적 금융파워도 자연스레 동반 성장하게 했다. 

국부펀드 운용 전략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 금융개혁 정책과 맞물려 외국 자금과 정보를 싱가포르로 유입시켰고 이 결과 스위스에 이은 ‘자본 은신처’로 부각되면서 프라이빗 뱅킹을 위시한 금융서비스가 특화하기 시작했다.

◆홍콩과는 비교 거부…'트루 허브'는 싱가포르뿐

2스탬포드 로드(2Stamford Road) 소재 스위소텔 더 스탬포드 호텔에서 바라본 싱가포르 지하철(MRT) 시티홀역의 16일 오전 7시30분. 싱가포르의 이른 출근시간은 우리네 삶과 크게 다른 것이 없었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먼동에 맞서 양 어깨에 긴장을 고르게 덜고 출근하는 모습은 ‘이곳이 여의도’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다만 다인종이 한데 섞여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은 이색적이었다. 차도르를 두른 이슬람 여성 옆을 나란히 걷고 있는 중년의 흑인 남성. 캐주얼한 반팔 복장의 백인을 스쳐지나가는 말끔한 정장 차림의 동남아 여성.

바쁜 일상을 시작하는 그들의 출근전쟁을 보고난 후 아침식사를 하고 인터뷰를 위해 우리투자증권이 위치한 래플스 플레이스의 원래플스플레이스빌딩으로 이동, 이 증권사 박병호 현지법인장과 신남 우리앱솔루트파트너스 최고재무책임자(CFO) 겸 리스크관리임원(CRO)을 만났다.  
   
   
왼쪽부터 우리투자증권 에드워드 S. 문 싱가포르 투자관리책임자, 박병호 싱가포르 현지법인장, 우리앱솔루트파트너스 신남 최고재무책임자 겸 리스크관리임원.
싱가포르 금융시장만이 가진 최고의 장점과 홍콩과의 차이점으로 첫 질문을 시작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른 답변에 초반부터 당황스러웠다. 중국을 배경으로 한 자금시장의 차이점 등을 답변으로 예상했지만 박 법인장이 꼽은 싱가포르 금융시장의 최고 장점은 바로 ‘영어’였던 것. 

박 법인장은 “싱가포르는 이전부터 영어를 표준어로 사용했지만 2000년 초 이민정책 완화로 이민자 유입률이 싱가포르 국민 출생률을 앞지르는 현상이 나타날 정도가 되면서 영어 토착화가 강해졌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에 따라 전 세계 금융인들이 큰 언어 부담 없이 소통을 할 수 있게 됐고 허브로서의 특장점을 더욱 부각하는 계기가 됐다”고 덧붙였다.

실제 싱가포르는 국가에 도움이 될 만한 인재를 적극 수용하자는 이민 정책을 최근까지 지속했고 타국에 비해 영주권 및 취업비자 취득이 용이해지면서 자본 줄을 가진 이민세력이 현재까지 꾸준히 유입되고 있다.

신 CFO도 “라이벌 관계에 있는 홍콩은 싱가포르만큼 영어를 사용하지는 않는다”며 “금융시장의 위치를 놓고 봐도 최근 홍콩은 중국의 창구역할을 하는데 급급한 구석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금융서비스를 제외한 경제의 근간에서도 차이가 있다고 진단했다. 홍콩은 중국반환 이후 중국으로 제조업이 합쳐지면서 1980년 GDP의 23.6%에 이르던 제조업 비중이 현재 2% 수준으로 수직 낙하했지만 싱가포르는 제조업 비중이 20%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부연이다.

특히 홍콩에서는 위안화의 비중이 급증한 반면 싱가포르에서 위안화의 위상은 홍콩에 비해 높은 편이 아니다. 여전히 외환시장의 키는 달러가 잡고 있으며 내수시장은 싱가포르달러가  기세를 떨치고 있다.

우리투자증권과 같은 빌딩에 자리를 잡고 있는 한국투자증권의 남궁성 현지법인장도 17일 인터뷰를 통해 “이와 더불어 홍콩의 마켓성향을 보면 차이나포지션 펀드에 치중한 경향이 있으나 싱가포르는 동남아시아와 인도는 물론 중동까지 커버하고 있어 아시아 허브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며 싱가포르 시장의 다양성을 높이 평가했다.

◆한국금융시장의 훌륭한 타산지석 ‘싱가포르’

몸으로 실제 마주한 싱가포르의 금융시장은 우리나라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카드 발급 및 사용, 현금자동입출금기(ATM)이용 등 개인 금융서비스의 경우는 우리나라가 훨씬 우수했다. ‘허브’란 수식어는 철저히 기업에 국한된 용어인 듯했다.

그러나 싱가포르에서 활약 중인 한국 증시전문가 3인방은 이에 대해서도 우리나라가 본받아야 할 부분이 있다고 설명했다.

박 법인장은 “우리나라 개인 금융서비스가 우수한 것은 칭찬받을 일이나 따져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며 “내부에서 내부로 도는 자금과 밖에서 밖으로 흐르는 돈은 질적으로 다른데 우리나라 금융시장은 안쪽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고 꼬집었다.  

신 CFO 역시 “개인 금융서비스가 발전한 것은 한국 금융업계가 국내시장에만 집중한 결과일지도 모른다”라며 “싱가포르가 개인서비스를 강화하는 것보다 우리나라가 금융허브로 발전하는 일이 훨씬 어려울 것”이라고 박 법인장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 

무엇보다 이들 3인방은 우리나라 금융산업의 발전을 위한 최우선 선행과제로 인적 인프라 구성을 꼽았다. 물론 금융투자협회와 한국거래소 등 금융투자업계의 노력이 있기는 하지만 ‘적재적소 투입 가능형 인재’를 기르는 데는 역부족이란 평가에서다.

이들의 말처럼 싱가포르의 경우 폴리테크닉이란 인재양성소가 있다. 1954년 설립된 이곳은 싱가포르 금융전문가를 집중 육성하는 메카로 매년 5000명 정도의 인재를 꾸준히 배출하고 있으며 졸업생들은 글로벌 금융투자업계의 애널리스트, 트레이더, 파생상품 설계 및 운용자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다.

3년제인 폴리테크닉의 1년 학비는 2만 싱가포르달러지만 정부에서 90%를 지원해 금전적인 부담이 크지 않다. 미시·거시경제부터 증권과 옵션 선물, 외환까지 이르는 포괄적 교육을 실시하며 두 달에서 반년 정도 홍콩상하이은행(HSBC), 스위스금융그룹(UBS), 시티를 비롯한 글로벌 유수 투자은행(IB) 등에서 까다로운 인턴십 과정을 거친다.

또한 이들은 국가적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 법인장은 “과거 한국 일반 가정에서는 큰아들의 경우 확실한 지원으로 교육을 책임져 인재로 육성시키고자 노력했지만 둘째딸부터는 중학교만 마쳐도 산업현장으로 떠밀었다”고 역설했다. 여기서 큰아들은 삼성 등 대기업이고 둘째딸은 금융투자업계와 중소기업에 해당한다는 것. 

이에 반해 싱가포르는 금융 산업에 있어 운영에 관여하는 등 직접 규제는 거의 없고 시스템 및 금융인프라 구축 등의 지원만 펼치고 있어 해외자본이 유입될 수밖에 없는 환경적 조건이 완벽하다는 것이다.

   
한국투자증권 남궁성 싱가포르 현지법인장이 싱가포르와 홍콩 금융시장의 차이점을 설명하고 있다.
남궁 법인장은 “금융산업에 특혜가 대부분인 싱가포르에 비해 한국은 시스템적으로 미비한 측면이 많다”고 지적하며 오일 머니를 예로 들었다.

이와 함께 남궁 법인장은 “현재 세계 각국은 글로벌 금융위기에도 안정세를 구가하고 있는 대표적 오일 머니인 ‘이슬람 채권(수쿠크)’을 유치하기 위해 금융제도를 정비하는 등 날을 세우고 있지만 우리 정부는 초반부터 의견이 맞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그는 “싱가포르는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에 맞춰 세법을 개정, 과세문제를 해결했고 이슬람 금융상품 유치에도 열을 올리고 있는데 국회 상임위원회의 반대로 법규개정이 좌절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남궁 법인장의 말대로 우리 정부는 지난해 말 국내법상 채권으로 분류되지 않는 이슬람 채권에 취득·등록세 등을 면제해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을 추진, 오일 머니 유치를 위한 초석을 다듬고자 했지만 ‘내부의 적’이라는 암초를 만나 좌초된 바 있다.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일부 의원이 이슬람 채권에 대한 세금 면제에 대한 타 외화 채권과의 형평성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이에 대해 남궁 법인장은 “이미 비즈니스 코스트가 상당히 낮아졌음에도 불구, 싱가포르 정부는 추가적인 금융 인프라 구축에 나서는 등 외국 자본 유치를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며 “한국도 철저한 현지화 및 수요자 우선 전략으로 금융 허브 육성에 박차를 가해야한다”고 재차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