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국내 대기업들은 대내외 경제 상황과 경영 방향에 따라 성장을 거듭하거나 반대로 몰락의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기업일지라도 변화의 바람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2, 3류 기업으로 주저앉기 십상이다. 기업은 끊임없이 ‘선택’과 ‘집중’을 요구받고 있다. 국내 산업을 이끌고 있는 주요 대기업들의 ‘선택’과 ‘집중’을 조명하는 특별기획 ‘대기업해부’ 이번 회에는 코오롱을 조명한다. 태동과 성장, 계열사 지분구조를 두 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기적의 섬유’로 불리는 나일론을 국내에 처음 소개한 코오롱그룹의 태동은 지난 1957년 4월 한국 섬유산업의 기수 ‘한국나이롱주식회사(이하 한국나이롱)’로 거슬러 올라간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코오롱 창업주 고 이원만 회장은 앞서 지난 1951년 일본인과 합작해 ‘삼경물산’이라는 무역회사를 세우고 지난 1953년 국내 나일론 시장을 독점한다.
이 회장은 사업이 번창하자 1954년 12월 삼경물산 서울사무소를 설립하고, 사무소 대표로 아들 이동찬(현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을 임명한다. 이들은 대구 동구 신천동 일대 부지를 매입, 1957년 4월 한국나이롱을 설립, 그해 11월 공장을 건립한다. 그리고 1년이 지난 1958년 10월 국내 첫 나일론 공장인 대구공장을 완공한다.
◆불모지에서 탄생한 ‘나일론6’
인류발전사에 있어 필수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의식주 중에서 섬유의 역할은 단연 첫 손에 꼽힌다. 우리 역사에서 등장하는 섬유는 사실 무명이나 삼베 그리고 일부 특권층이 향유할 수 있었던 사라능단(紗羅綾緞, 비단을 통칭하는 말)이 있었다.
하지만 서구의 산업혁명 이후 직조기술과 방적기술의 발달로 서민들도 다양한 섬유를 향유할 수 있었으나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제국주의 수탈로 인해 근대화 시대에도 한국민들에게 무명과 삼베 이외의 섬유를 접하기는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여기에 한국전쟁을 통해 그나마 남아 있던 경공업 산업기반 시설이 파괴된 상태에서 서방국가의 원조 이외에 우리 손으로 섬유를 만든다는 것은 꿈 같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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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오롱그룹 창업자인 이원만 회장(좌)과 이동찬 명예 회장(우)은 불모지라 할 수 있는 국내에 최초로 나이론 도입 및 생산하는데 성공했다. |
우리나라 역시 한국전쟁 이후 1인당 국민소득 68달러라는 극빈국에 속했지만 황무지 속에서 경제 자립을 위한 첫 시동을 걸면서 섬유 산업에 관심을 기울였다.
공장을 첫 가동할 당시 한국나이롱은 원사를 가공한 양질의 스트레치 나일론을 기대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매끄러워야할 나일론 가닥이 일본인의 이탈리아산 기계 사이에 엉겨 붙어버린 것.
하지만, 한국나이롱은 공장을 포기하지 않고, 삼경물산 수익을 지속적으로 투자하며, 문제점을 파악해 나갔다. 결국, 이듬해인 1959년 1월 스트레치 나일론을 생산하는 데에 성공한다.
한국나이롱은 이후 1963년, 일본 도레이社로부터 나일론 제조기술을 이전받았다. 반일감정이 높았던 상황에서 이 회장과의 관계를 중시한 당시 도레이 마에다 회장은 한국에 나일론 기술을 이전하는 과감한 결단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그해 8월, 국내 최초로 일산 2.5톤 규모의 나일론 원사공장이 준공된다. 준공식은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이 참석할 정도로 국가적인 관심사였다.
한국나이롱은 1964년 1월1일 마침내 한국나일론 원사 공장이 가동을 시작한다. 생산된 원사는 ‘나일론6’으로, 메이드인 코리아의 첫 나일론 상품명이 바로 ‘코오롱(KOLON)’이다. 이어 국산 나일론으로 만든 싼 가격의 가공제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나이롱이 만든 양말을 생산하는 업체는 100개가 넘었고, 이들 업체가 생산하는 양말은 연간 2000만켤레가 넘었는데, 이는 회사 전체 생산량의 40%가 넘는 수치다.
1963년, 국내기업으로는 처음으로 해외에 수출하기 시작한 한국나이롱은 연간 300만달러의 수출실적도 올렸다.
코오롱 전신인 한국나이롱의 나일론 생산은 한국 섬유개발사에 있어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나일론 기술을 확보한 한국은 1960년대 말 마침내 당시 또 다른 ‘꿈의 섬유’로 불리던 폴리에스터 섬유 생산에 성공한다.
나일론이 보편화되면서 품귀현상까지 빚어졌고, 한국나이롱은 1967년 공장을 증설하며 10톤 공장으로 도약했다. 이어 폴리에스터사 제조에도 착수해 1968년 한국포리에스텔 등을 설립하는 등 본격적으로 국내 합섬시대의 개막을 선도해왔다.
◆변화의 중심에 선 R&D 투자
1977년, 한국나이롱은 한국포리에스텔과 합병, 주식회사 ‘코오롱’으로 상호를 변경한다. 급변하는 새로운 시대를 맞아 제조업에 첨단 경영을 도입함으로써 새로운 도약에 박차를 가하기 위한 대책이었다.
뿐만 아니라, 원자재 가격 폭등과 중국 물량공세, 해외 기업들의 차별화 제품 공세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지속적인 R&D 투자와 함께 기술혁신을 중심으로 변화를 거듭해왔다.
코오롱은 국내 최초로 자동차소재인 타이어코드 사업 착수(1973년) 등 사업다양화를 가속화한다. 또, 1980년대부터는 ‘변신’이라는 모토아래 기존 섬유산업의 양적·질적 성장도 함께 도모하면서 필름 및 산업자재 등 관련 사업 분야로 사업영역을 확대했다.
국내 최초로 IT소재 필름 개발(1988년) 등 코오롱의 사업다각화 집중으로 전자재료·산업소재 등 제품들은 기업의 캐시카우(Cash Cow) 역할을 톡톡히 해왔으며 오늘날 코오롱인더스트리가 글로벌 종합화학 소재기업으로 발전하는 밑바탕이 됐다.
이후 코오롱은 1990년대부터 원사부문에서 새로운 수익모델을 찾고자 차별화 제품 개발과 함께 고도의 기술력이 요구되는 초극세사 기술개발에 집중했다.
그 결과, 1993년 초극세사를 이용한 고도 원사기술과 초정밀 공정관리 기술이 총 결집된 첨단 섬유소재, 인공피혁 ‘샤무드’를 세계 3번째로 양산에 성공하게 된다. 여기에 코오롱인더스트리는 현재 초극세사 기술을 침구에 접목시켜 뛰어난 항균기능을 가진 ‘미오셀까사’를 런칭해 제품다각화를 통한 첨단섬유의 대중화에도 힘쓰고 있다.
2000년대 들어서 코오롱은 디스플레이 소재를 비롯한 전자재료 개발에 중점을 두고 사업구조 고도화에 나선다. 2002년 LCD용 광확산 및 프리즘 필름 개발을 성공하게 되며 2005년에는 세계 3번째, 국내 최초로 독자 기술로서 강철보다 강한 섬유 헤라크론 양산에 성공했다.
◆미래성장 위한 지주사 체제 전환
사업부분을 코오롱인더스트리로 떠어내고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한 코오롱은 올해 우수한 실적을 기대하고 있다.
코오롱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전력적인 합병과 분할을 통해 사업간 시너지를 증진시키고 전문화된 종합화학·소재·부품기업으로서 내실을 다져나가고 있다. 지주사 전환 작업이 속도를 내고 있는 한편, 사업별 경쟁력 강화차원에서 추진 중인 계열사 통합 역시 순조롭게 진행했다.
2007년 코오롱유화 합병을 시작으로, 사업구조 고도화를 통해 기업가치 극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코오롱은 지난 2008년 원사사업부문을 코오롱패션머티리얼에 분할했다. 이듬해인 2009년 8월 FnC코오롱 합병했다.
지난해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기 시작한 코오롱그룹은 기존 사업부문을 분할해 코오롱인더스트리를 신설했다. 코오롱인더스트리는 책임경영체제 아래 각 분야별 시장 점유율을 적극적으로 확대하는 동시에 신소재 사업을 확대해 미래 성장 동력을 강화하는 사업포트폴리오를 구성해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다.
코오롱은 지난해 누계 기준 매출 3조2000억원을 돌파, 올해도 우수한 실적이 기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