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조선시대 최고 풍류시인으로 매월당 김시습과 백호 임제 선생을 손꼽는다.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 선생은 사대부 문학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16세기 말의 선조 시대에 활약하며 가히 천재적인 재능과 개성을 시풍으로 읊어낸 시인이다.
본관이 나주인 백호 선생은 호남의 문인들과 자주 어울렸는데 율곡 이이, 송강 정철, 백사 이항복, 상촌 신흠, 옥봉 백광훈 등 당대 문장가들과 풍류를 읊으며 시를 주고 받았다. 그의 시풍은 조선중기 가장 호탕하기로 유명했다.
심지어 그 엄한 성리학이 굳건히 자리잡은 상황에서 이미 죽은 황진이를 기리워하는 시를 읊었다가 파직당한 당대의 로맨티스트로도 유명하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다.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서러워하노라”
교과서에도 등장할 정도로 명문장으로 알려진 이 시는 백호 선생이 평안부사로 부임해 갈 때 개성에 있는 황진이 무덤에 들려 잔을 붓고 읊은 시였다. 당시 사대부가 일개 기생의 묘를 참배하고 시까지 지었다하여 평안부사 부임도 하기 전에 파직 당했다는 이야기다.
백호 선생은 문장에 뛰어날 뿐 아니라 선비들이 동서로 나뉘어 다투는 것을 개탄했다.
그의 눈에 비친 조정은 앞서 말한 대로 동서 당파싸움으로 서로 헐뜯고 비방하고 질시하면서 편당을 갈라 공명을 탈취하려는 속물들이었으며, 그의 눈에는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벼슬에 대한 흥미를 잃은 그는 울분과 실의에 가득 찼다. 10년간의 벼슬을 버리고 유람을 시작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많은 일화를 남겼다. 워낙 시재가 뛰어났던 그의 호방하고 쾌활한 시풍은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일컬어져 많은 사람들이 애송했다. 율곡 이이도 그를 기남아(奇男兒)라고 칭했다고 전한다. 그의 시 한편을 읽어보자.
“세상에 태어나서 만주 땅을 못 삼켰으니 그 어느 날에나 서울 땅을 다시 밟을 것이냐.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말을 재촉해 돌아가는데 눈이 시린 저 먼 하늘 짙은 안개가 걷히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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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형모 남도매일 편집국장 |
그의 사상은 호방하면서도 명쾌하고 드높은 기상을 지녔다. 나라의 자주성회복과 강대한 고구려의 옛 땅 만주를 되찾고 세계를 호령하고 싶은 심정이 절절히 표현된 이 시는 나주에 있는 그의 묘 앞의 시비(詩碑)에 적혀있다.
그런데 이같은 기상을 기리기 위해 나주시가 그의 고향인 다시면 회진리에 사업비 33억원을 들여 백호문학관을 착공, 사업추진 4년여만인 지난 7월 준공한 건립했으나 이 문학관이 수개월째 방치되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다.
운영체계 부족과 유물 유적 주변 볼거리 미흡 등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이유가 어찌됐든 빠른 시일 내에 알맞은 운영체계를 갖춰 후손과 외지인들에게 그의 문학정신을 널리 알릴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