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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100주년]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 일대기

이름중간자 ‘두’와 뫼 ‘산’을 붙여…

박지영 기자 기자  2010.10.06 17: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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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내일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여러분 기업과 우리나라 상공업계 발전을 위해 헌신할 것을 굳게 다짐하는 바입니다.” 1973년 7월 11일 대한상공회의소 8대 회장으로 연임된 박두병 두산 초대회장이 취임사에서 한 말이다. 그로부터 1개월도 채 못 된 8월 4일, 박두병 초대회장은 63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순간까지 나라경제와 기업을 걱정했던 박 초대회장. 6일 박 초대회장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그가 걸어온 삶을 되짚어 봤다.


1910년 매헌 박승직 두산 창업주 장남으로 태어난 박두병 초대회장은 1936년 ‘박승직상점’서 첫 경영수업을 쌓았다. 그렇다고 사회경험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남의 밥을 먹어봐야 한다”는 선친의 뜻에 따라 3년 간 ‘남의 집(조선은행: 현 한국은행) 살이’도 해봤다.

   
▲6일 탄생 100주기를 맞이한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
선친의 독특한 자녀교육 법은 이뿐만 아니었다. 빈농의 셋째아들로 태어나 열아홉 어린나이에 보따리 장사를 하면서 두산그룹 초석을 다졌던 박승직 창업주는 늘 박 초대회장에게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도둑이 와서 재물을 훔쳐갈 순 있지만 머리에 들어 있는 것은 절대 훔쳐갈 수 없다”는 게 주된 가르침이었다. 박 초대회장이 치열한 경쟁을 뚫고 경성고등상업학교(현 서울대 상대)를 나오게 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다시 태어나도 장사꾼”

박 초대회장이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한 것은 해방 직후. 박 초대회장은 새롭게 운수업을 시작하면서 회사이름을 ‘두산상회’라고 지었다. 이는 선친의 뜻이 깊게 반영된 것이었다.

“네 이름의 가운데 자인 말 ‘두(斗)’자에 뫼 ‘산(山)’자를 붙여 두산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한 말 한 말 차근차근 쉬지 않고 쌓아 올려 산같이 커지라는 의미였다.

그렇다고 상호에 재화의 축적을 바라는 뜻만 있는 게 아니었다. 사업을 번창시키되, 투기적인 재화 축적이 아니라 점진적이고도 단계적인 발전을 도모하라는 뜻이 그 속에 담겨 있었다.

운수업은 당시로서는 신사업이었다. 신사업 진출에 맞춰 새 상호를 붙인 데는, 세대교체적 의미뿐만 아니라 면포 상점이라는 가업으로부터 새 시대에 맞는 새 업종으로 전환을 인정하는 의미 또한 적지 않았다. 
 
   
<사진설명= 1968년 5월 8일 제2차 아시아상공회의소연합회 총회에서 참석자들과 악수를 교환하는 박두병 초대회장(오른쪽)>
박 초대회장은 경영철학에서는 인화, 근검, 정직, 신용을 실천한 선친의 길을 따랐다. 박 창업주 경영이념을 본받아 평소 기업경영에서 사람을 중요하게 여겼던 박 초대회장은 “반목은 결국 파멸을 가져오고, 화목은 영원한 발전을 의미한다”며 인화를 중시했다.

평소 박 초대회장은 “상하 좌우의 모든 사람이 참된 조화를 이뤄야 한다”며 “강요된 인화가 아닌 구성원 각자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인화가 참된 인화”라고 강조해 왔다.

인재육성을 위해 이미 1950년대에 독일과 미국 등지로 직원을 유학 보낸 것은 그가 인재중시 경영에 얼마나 일찌감치 눈 떴는지를 읽게 한다. 현재 두산그룹의 ‘사람이 미래다’라는 광고메시지도 사실 박 회장의 경영철학에서부터 출발했다.

박 초대회장은 또 성실함을 강조했다. 순리에 어긋나는 과욕과 무리야말로 연강이 가장 경계한 것이었다. 지나친 욕심은 반드시 무리한 행위를 낳게 하고, 결국은 자신을 파멸시키게 된다는 것이 연강의 신념이었다.

   
<사진설명= 1967년 3월 11일 서울에서 열린 국제로타리클럽 정기회의에 참석한 박두병 초대회장>
정직도 중요한 경영철학 중 하나였다. 박 초대회장은 중화학공업 진출을 원했고, 또 그 길이 열렸지만 결국 그 꿈을 접었다.

박 초대회장은 60년대 중반부터 6년간 외자도입심의위원회 위원으로 있으면서 외국 자본을 들여올 수 있었다. 더욱이 당시 경제정책 자문을 위해 자주 대통령을 만나볼 수 있었다. 기간산업 진출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외자도입심의위원회에 있으면서 그렇게 부정직한 일은 할 없다는 것이 박 초대회장의 철학이었다. 그만큼 정직과 도덕성을 그 무엇보다 중요시한 것이다.

박 초대회장은 기업인의 사회적 책임 이행을 강조하고 실천한 CEO였다. 그는 기업을 합리화하고 발전시킴으로써 값싸고 품질 좋은 상품을 소비자에게 공급하는 것이 곧 기업인의 사회적 책임 이행이라 생각했다. 나아가서는 기업 이윤의 사회적 환원을 실천하는 것이 보다 더 적극적인 사회적 책임 이행이라고 믿었다.

박 초대회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기가 갖고 있는 사업체가 절대로 자기 개인 것이 아니고 사회의 것, 나라의 것이라는 생각을 모든 기업인이 가져야 할 줄 안다”며 “물론 인간인 이상 자손들에게도 물려주어야겠지만 (기업이윤은) 사회로 환원시킨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진설명= 1968년 3월 14일 국내 전자공업센터 설립을 위해 예비조사 차 방한한 재미과학자 김완희 박사 일행을 대한상공회의속 집무실에서 접견하는 모습> 
◆“건강 보다 일” 암투병에도 집무

경영철학대로 꾸준히 두산을 키운 박 초대회장은 대한상공회의소 제6대 회장으로 선출된 1967년부터 국제활동에도 힘을 쏟았다. 특히 한국인 최초로 1970년 아시아상공회의소연합회 회장에 피선돼 일본·대만·필리핀 등 아시아를 대표하는 재계 리더로 자리매김하며 한국 기업의 국제적 위상을 한층 높였다.

박 초대회장의 세계화 노력은 경제성장기 한국 경제와 상공업계의 발전을 떠받치는 기둥이 됐다. 이후 폐암이 발병한 박 초대회장은 1972년 11월 수술을 받고도 이전과 다름없이 대한상의에 나와 집무를 봤다.

많은 사람들이 ‘몸을 생각하시라’고 간곡히 만류했지만 박 초대회장은 “나의 병이 무엇이고 나의 앞이 어찌될 것인지는 누구라도 다 아는 것 아닙니까? 내가 그나마 여력을 아껴 무료히 지낸다면 이야말로 오히려 안 되는 것이지요. 끝까지 내가 할 일에 대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고, 지금의 나에겐 일하는 것이 더 좋다”고 답했다.

   
<사진설명= 1968년 5월 12일 대한상공회의소 대강당에서 열린 제5회 상공인의 날 기념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박두병 초대회장 모습>
또 박 초대회장은 생전 동아방송 ‘인생의 증언’에 출연, “만일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이 되고 싶을까? 정치가, 학자, 군인도 있지만 역시 내게는 장사꾼 밖에는 어울리는 게 없을 것 같다”고도 말했다.

한편, 두산은 박 초대회장이 타계한 지 5년째 되던 1978년 ‘국가 발전의 원동력은 교육’이라는 그의 유지에 따라 연강재단을 설립하고 각종 장학, 학술, 문화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중앙대를 통해 대학교육 발전에 힘을 쏟고 있는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