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나른한 오후, 모처럼 시집을 펼쳤다. 코웃음밖에 나오지 않을 얇은 시집의 아주 짧은 시 하나를 읽고서 문득 든 생각.
"시(時)를 읽어본 지가 언제였더라? 이 시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은...?"
기억을 더듬으며 찾아보지만… 여러 작가들의 시를 읽으면서 느꼈던 감동들이 이제는 다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눈에 힘을 주고 찾아봐도 보이지가 않는다. “그래도 한 땐 문학소녀였잖아…”라는 말로 자신을 위로해보지만, 그 상실감에 대한 충격은 가시질 않는다.
그 상실감을 잊기 위해서... 아니, 몸과 마음으로 시를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감동을 찾아 길을 떠났다. 이번에는 옥천군 옥천읍 구읍으로 가보았다.
가락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덕분에 어렸을 적부터 민요를 많이 듣고 자랐다. 가요를 싫어하셨던 아버지가 유달리 많이 들으셨던 노래 한 곡이 있었다. 덕분에 그 노래는 어렸을 적부터 완벽하게 외워서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 앞에서 멋드러지게 부를 수 있어 나는 인기를 독차지하곤 했는데…
그 노래는 바로 이동건, 박인수의 향수, 아니 정지용의 시 “향수”다. 객지생활 3년차에 접어든 나에게 이 시는 어렸을 적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고향을 생각하게 하는 촉매제로 작용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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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간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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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향수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떠난 여행. 시인 정지용의 고향 충청북도 옥천은 영동 다음으로 최남단에 위치해 있다. 충북의 도청소재지 청주와는 거리가 좀 떨어져서 오히려 대전이 옥천군민들의 생활권이 되었는데, 대전에서 옥천까지는 시내버스를 타고 40분이면 도착할 수 있고, 철도를 이용한다면 한 정거장, 무궁화호로는 10여분내로 도착할 수 있는 가까운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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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간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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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시가지를 관통하는 501번 지방도를 따라 금구리, 삼양리를 경유해서 도착한 구읍삼거리. 이색적인 간판들이 반긴다. 전국 곳곳을 둘러보면서 예쁘고 귀여운, 독특한 간판들은 봤지만 시가 있는 간판과의 대면은 처음이다. “과연 정지용의 고향이로다”라는 탄성이 절로 나올 간판들. 간판 하나하나에 시가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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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간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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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아침에도 문을 연 구읍의 우체국. 빠알간 앵두를 연상케 하는 앵도 미용실. 해설피 금빛 울음을 우는 소가 너무나도 슬프게 느껴지는 정육점까지. 갖가지 간판들이 한껏 시로 단장을 하고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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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시에 나오는 실개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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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생가임을 알리는 표지판을 따라 걷는 길. 실개천이 먼저 반긴다. 이 하천이 바로 시에서 나오는 그 하천이다. 지금은 콘크리트로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어서 살짝 아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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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시인의 생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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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실개천을 가로질러 놓여진 청석교를 지나면 만나게 되는 정지용 생가. 일요일 아침 8시, 문을 열자마자 들어간 곳에는 활짝 열린 방문을 통해 정지용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집의 전체적으로 “ㄱ”자 모양이며 마주보이는 방향으로 “ㅡ”자형 창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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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시어에 따라 배치된 정지용 생가 내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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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시인의 소박한 삶을 엿볼 수 있는 생가. 안쪽방에서는 한약방에서나 볼 수 있는 가구를 배치해서 그의 아버지가 한약방을 했음을 알 수가 있다. 자세히 방 내부를 살펴보면 질화로와 등잔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향수" 시어에 따라 배치된 소품들이, 다시금 “향수”를 떠올리게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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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문학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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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생가 뒤편에 오도커니 자리잡고 있는 문학관. 마당에도 정지용 시인 동상이 방문하는 사람들을 환영하고 있지만, 내부에 들어서자 정지용 선생이 다시 한번 반긴다. 걸음을 옮겨 문학전시실에 들어서자 그의 문학을 접할 수 있었는데, 연보, 시와 산문집 초간본 등이 전시 돼 있었다. 그의 문학세계가 한 눈에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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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문학관 내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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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정지용 시인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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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위에 흐르는 정지용 선생의 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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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양 손바닥을 내밀어본다. 그러자 손이 스크린이 되어 손 위에는 정지용 선생의 시가 흐른다. 내 손 위로 흐르는 시, 시는 손으로 흘러, 내 귀를 타고, 마음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며 고요히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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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읍을 걷다가 발견한 슬레이트 지붕 위의 돌나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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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그의 시의 감동을 느끼고 나와 구읍을 걸어본다. 어떤 골목길에 접어드니 아파트를 뒤에 벽삼아 서 있는 낡은 교회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십자가를 달고 있지만서도 이 건물은 실제 교회는 아니다. 현재는 교육관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예전에는 “교회당”이라 불렸고, 건축학자들에게 있어서는 미국식 교회건축물이라고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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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년의 세월을 안고 있는 옥천 영광교회 교육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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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초기 교회당은 초가집이나 한옥에서 시작되었다. 현재 옥천 영광교회의 교육관으로 남아있는 구읍의 교회당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1910년 일제강점시 시절, 교회당이 처음 지어질 때 초가집이었고 이후 기와집으로 개조했으며 6.25이후 지금의 모습으로 새로 지었다고 한다. 그 이후 계속 그 모습으로 이제는 교회의 교육관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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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꾼들에게 인기 좋은 교동저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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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 대가 가끔 지나가는, 아주 한적한 실개천 옆의 검정 아스팔트 길을 따라 걷다보니 초록색 둑이 보인다. 무엇인고 크게 눈을 뜨고 보니 저수지다. 교동리에 위치해 있다고해서, 그 이름을 딴 교동저수지였다. 일요일 오전부터 낚시에 열중하고 있는 강태공들의 모습이 멀리 보이고, 저수지 주변으로는 빨강 파랑의 슬레이트 주택이 초록과 어우러져 하나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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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저수지 둑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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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저수지는 1960년대 초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하여 축조되었는데, 축조 이후 바닥을 드러낸 적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저수지보다도 그 옆에 옥천과 보은을 잇는 37번 국도변의 벚꽃길이 아름답기로 더 이름이 났다. 농업용수 사용이 점점 줄어들자 유료낚시터로 임대했고 물이 맑은 1급수 지역이라 관광객들보다도 많은 낚시꾼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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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법한 옥천묵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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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구읍을 이곳저곳 발길 닿는대로 걷다보니 허기가 지기 시작했다. 논 옆에 자리잡은 묵집. 간판을 눈여겨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가게라고 하기보다도 오히려 평범한 가정집 같은 분위기의 음식점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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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담한 한상, 가운데는 도토리파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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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를 잡고 앉아있으니, 상에는 김치, 동치미, 간장, 다진 김치, 다진 고추가 올라온다. 그리고 주방에서 고소한 냄새가 솔솔 풍겨나오기 시작한다. 코를 자극하는 고소한 내음의 정체는 바로 도토리파전. 도토리 묵을 갈아넣어서 둥그렇게 지져낸, 파를 아낌없이 넣어 주인의 넉넉한 인심을 엿볼 수 있는 이 도토리파전은 쫀득할 뿐더러 맛도 고소하다.
비가 오면 파전에 술 한잔이 생각난다고 하더라만은 옥천에서 이 도토리 파전을 맛 본 이상, 이젠 내리는 빗방울에 도토리 파전이 먼저 생각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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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읍의 별미, 도토리 묵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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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전을 게눈 감추듯이 먹고 나니 상 위에는 주인공인 묵밥이 등장한다. 누가 뭐라할 것 없이 숟가락을 들어 으깬 고추와 김치를 넣어 간을 맞춘 후 슥슥 잘 섞어서 후룩후룩 먹기 시작한다. 분명 내가 씹는 것은 맞는데 술술 부드럽게 잘 넘어간다. 이리 쉽게도 잘 먹는 묵이지만, 만드는 법은 상당히 어렵다. 자칫하다가는 너무 묽거나 되기 일쑤인데, 여기 묵은 쫀득쫀득, 탱탱하니 씹는 맛도 일품이다.
때묻지 않은 시골 자연의 순수함을 비롯해서 시의 감동을 느낄 수 있었던. 더불어 맛있는 묵밥으로 포만감까지 얻은 옥천으로의 여행. 아직도 고향을 그리는 애절한 마음이 남아있어서, 정지용 시 향수가 세월이 흘러도 존재하고 있어서, 더불어 아직까진 내 마음은 시들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안고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바쁜 일상 속에서는 여러 문학작품을 통해 얻은 감동들을 비롯해서 어릴 적 추억까지 잊고 살 때가 있다. 내가 왜 이렇게 되었나 후회를 하기보다도 그 상실감에 무력하게 있는 것보다도 오히려 그 때를 떠올려 보기 위해 어디론가 떠나보는 걸 권해본다.
►정지용 문학관 : 충북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39, 043-733-6078
►옥천묵집 : 충북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24-1, 043-732-7947
►교동저수지 : 충북 옥천군 옥천읍 교동리, 043-731-4287
※ 여행 칼럼니스트 고연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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