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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연 한화회장 취임직후 ‘M&A 성과’

[50대기업 해부] 한화그룹…①태동과 성장

박지영 기자 기자  2010.09.16 09: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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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국내 대기업들은 대내외 경제 상황과 경영 방향에 따라 성장을 거듭하거나, 반대로 몰락의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기업일지라도 변화의 바람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2, 3류 기업으로 주저앉기 십상이다. 기업은 끊임없이 ‘선택’과 ‘집중’을 요구받고 있다. 국내 산업을 이끌고 있는 주요 대기업들의 ‘선택’과 ‘집중’을 조명하는 특별기획 [50대기업 완벽 대해부] 이번 회에는 한화그룹을 조명한다. 그룹의 태동과 성장, 계열사 지분구조와 후계구도 등을 두 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연암 김종희 한화그룹 창업회장은 1922년 충남 천안서 부친 김재민 옹과 모친 오명철 여사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원산상업학교를 졸업한 김 창업회장은 조선화약공판에 입사, 화약과 첫 인연을 맺었다.

그러던 1945년 9월 김 창업회장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미 군정법령에 따라 전국 31개소 화약고 관리인에 김 창업회장이 뽑힌 것이다.

화약사업에 탄력을 받은 김 창업회장은 1952년 6월 관재청에서 실시한 조선화약공판 매각입찰에 참여, 23억4568만원에 회사를 손에 넣었다. 이후 그해 10월 한국화약㈜를 설립, 본격적으로 화약산업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한국 다이너마이트 산 증인

   
<사진설명= 한국화약 인천공장을 방문한 이승만 전 대통령이 김종희 창업회장(앞줄 가운데)에게 공장현황을 질문하고 있다.>
김 창업회장이 인생의 전환을 맞게 된 것은 1955년 어느 날이었다. 강성태 당시 상공부장관을 만난 김 창업회장은 이승만 대통령 지시를 전해 듣게 된다. 내용인 즉, “우리나라도 화약공장이 있는데 왜 화약을 만들지 못하느냐. 하루 속히 화약 만드는 방법을 강구해 보라”라는 것이었다.

그 때부터 김 창업회장은 다이너마이트 국산화에 혼심을 다했고, 결국 1958년 결실을 맺었다. 이로써 한국은 그해 6월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다이너마이트를 생산하는 나라가 됐다. 

승승장구하던 한국화약에 위기가 찾아온 건 1967년 즈음. PVC공업에 진출하면서부터다. 60년대 초 한국화약은 김 창업회장 지시로 석유화학분야 진출을 모색, 64년 11월 나프타 분해시설을 비롯, 석유화학계열 공장을 망라한 석유화학 사업계획을 완성했다.

하지만 정부는 한국화약의 석유화학 진출을 꺼렸다. 김 창업회장이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PVC공장 건설 및 제2정유공장 건설에 필요한 800만 달러 차관도입에 성공했지만 정부는 한국화약의 PVC사업 승인을 차일피일 미뤘다. 이로 인해 한국화약은 공장라인 가동까지 3년이란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여기에 출혈경쟁과 원료 폭등, 경기불황까지 겹치면서 자금회전 마저 어려워 졌다. 결국 부도어음이 쌓이게 됐다. 이러한 시련은 1967년부터 72년까지 5년간 지속됐다.   

하지만 김 창업회장은 특유의 강한 의지와 집념으로 이 시기를 극복했다. 1968년 1월 제3정유공장 운영권을 따낸 김 창업회장은 그해 11월 에너지사업 총괄 법인 ‘경인에너지개발주식회사’를 발족, 이듬해 3월 사명을 ‘경인에너지주식회사’로 변경하면서 민간 정유시대 깃발을 올렸다. 

적자에 허덕이던 한국화약은 이로써 △1978년 매출 250억원에 순이익 3억원 △1979년 매출 318억원 순이익 6억원 △1980년 매출 516억원 순이익 14억원이란 눈부신 성장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연암의 죽음… 젊은 총수 등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1981년 한국화약에 새바람이 불었다. 그해 7월 김 창업회장이 갑자기 타계하면서 김승연 현 회장이 그룹 경영권을 물려받게 된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 29세에 불과했다. 당연 주변의 시선 또한 ‘걱정 반 기대 반’ 근심 어렸다. 

그러나 김승연 회장은 1982년 한양화학(현 한화석유화학)을 인수하면서 주변의 우려를 단번에 불식시켰다. ‘젊은 혈기로 무리한다’는 말까지 들어가며 무수한 임원진 반대 속에서도 한양화학을 인수한 김 회장은 불과 1년 만에 자본잠식에 허덕이던 회사를 흑자기업으로 되돌려 놨다.

한국화약은 김승연 회장 취임과 동시에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1980년 7300억원이던 그룹매출은 불과 4년만에 2조1500억원으로 껑충 뛰었다. 전체 그룹 매출 중 절반가량은 김승연 회장이 인수한 한양화학과 경인에너지에서 발생했다. 재계순위도 10위에서 7위로 급부상했다. 김승연 회장을 두고 ‘한화그룹 제2의 창업주’라고 부르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1992년 10월 한국화약은 그룹 경영기능 강화를 위해 그룹 명칭을 ‘한화’로 변경, 모기업인 한국화약을 ㈜한화로 바꾸고 새로운 CI를 선포했다. 1994년 10월에는 계열사 상호에 ‘한화’를 사용, 그룹이미지를 통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