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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家 적통 ‘현대건설’ 어떤 회사?

박지영 기자 기자  2010.07.01 14: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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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현대건설의 시작은 1947년 5월 고 (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서울 중구 초동 정비소 한 귀퉁이에 ‘현대토건사’라는 간판을 내걸면서부터다. ‘현대토건사’가 지금의 ‘현대건설’로 이름을 바꾼 건 50년 1월. 이후 현대건설은 한국건설사에서 ‘최초의’라는 관용어를 휩쓸다 시피하며 차돌만큼이나 단단한 지위를 얻게 된다. 이런 현대건설에 두 번의 시련이 닥쳤다. 1997년 IMF 때와 2000년 ‘형제의 난’이 바로 그것이다. 결국 2001년 8월 그룹으로부터 계열 분리된 현대건설은 채권단 관리라는 치욕을 맞보며 현재에 이르게 됐다. 현대건설이 걸어온 길을 되짚어봤다. 



해방 직후인 1946년 4월,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두 명의 동업자와 함께 다 쓰러져가는 자동차수리공장(아도자동차수리공장)을 인수, 서울 중구 초동에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차렸다. 영문상호는 ‘Hyundai Motors Company’. 공교롭게도 오늘 날 현대자동차가 사용하는 영문이름과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정주영 명예회장은 새로운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자신은 자동차 수리비로 30만~40만원을 받은 데 반해 건설업자들은 이보다 곱절 이상 받아 가는 것이었다.

그 길로 정주영 명예회장은 정비소 한 귀퉁이에 ‘현대토건사’란 간판을 내걸고 건설업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1947년 5월 25일의 일이다.

건설업은 정주영 명예회장 스타일에 딱 맞았다. 이윽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1950년 1월, 현대토건과 현대자동차공업을 합병, 지금의 현대건설을 설립했다.

◆‘한강의 기적’ 으뜸주역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현대건설이 본격적으로 세를 확장하게 된 것은 1960년대. 6ㆍ25동란이 터지면서 부산으로 내려온 정주영 명예회장은 주한미군으로부터 색다른 사업제의를 받게 된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방한을 앞두고 UN묘지에 잔디를 심어달라는 것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정 명예회장은 무릎을 탁 치며 낙동강변으로 냅다 뛰었다. 그곳에서 가느다란 초록 청보리를 가득 베어온 그는 묘지인근에 심기 시작했다. 정 명예회장의 완벽한 시공에 감탄한 미군은 ‘원더풀, 굳 아이디어. 현다이 넘버원’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현대건설은 주한미군에서 발주한 공사를 모두 따낼 수 있었다.

현대건설의 쾌거는 이뿐만 아니다. 1968년 12월 우리나라 첫 고속도로인 경인고속도로를 시공한 데 이어 70년 경부고속도로를 개통하면서 전국 1일 생활권을 실현했다.

이후 현대건설은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1965년 결국 현대건설은 베트남 파타니나라티왓 공사를 따내는 데 성공, 국내건설업 사상 최초로 해외공사를 진행하게 됐다.

이듬해인 66년 베트남 준설공사까지 따낸 현대건설은 이를 계기로 해외곳곳 세를 넓히기 시작했다. 특히 1976년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산업항 공사수주는 한편의 드라마와 같았다.

당시 사우디아라비아 건설시장은 여타 해외시장과 마찬가지로 선진국의 독무대였다. 10개사만 초청, 진행한 주베일산업항 입찰은 특히 더했다. 일본 건설사조차 끼지 못할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대건설이 세계 대형건설사를 상대로 주베일산업항 공사를 낙찰 받았다.

최악의 외환위기를 겪고 있던 우리 정부로서도 낭보가 아닐 수 없었다. 이 단 한건으로 현대건설은 우리나라 예산액 절반과 맞먹는 9억30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현대건설은 시장다변화와 기술집약적 시공분야로 도약을 꾀했다. 대체에너지원인 원자력 개발에 발맞춰 1970~80년대에는 고리, 월성, 영광에 차례로 원자발전소를 건설했다.

또 88올림픽고속도로 건설공사와 호남고속도로, 부산지하철 1호선 토목공사 등에 참여해 사회간접시설을 건설하는 데 한몫하기도 했다. 90년대에는 싱가포르 창이공항 매립공사와 파키스탄의 차스마 수력발전소, 방글라데시의 자무나 교량 등 주로 대형공사를 맡았다.

특히 현대건설의 가장 중요한 일지 중 하나는 1990년대 후반 대북사업을 주도했다는 점이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소떼방북’으로 대표되는 대북사업은 ‘대북사업=현대건설’이라는 공식마저 만들었다.

◆‘왕자의 난’계기 내리막 

40여년 동안 건설업계 부동의 1위를 고수하던 현대건설에 위기가 닥쳤다. 1997년 IMF사태는 현대건설의 기반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게다가 2000년 그룹후계구도를 둘러싼 ‘왕자의 난’이 일면서 차돌만큼이나 단단했던 신뢰도도 일순간 바닥을 쳤다. 결국 그해 7월 현대건설은 신용평가회사로부터 신용등급 하향 조정되면서 일대 굴욕을 맛봤다.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만연 적자를 견디다 못한 현대건설은 2001년 워크아웃을 신청, 채단에 경영권을 넘겨주고 말았다. 당시 현대건설 성적은 2조9000억원 적자에 갚아야 할 돈만 4조4000억원이나 됐다. 

그로부터 4년 뒤, 특유의 기술력과 응집력으로 현대건설은 다시 일어섰다. 시공능력을 인정받아 2005년 이라크로부터 6억8000만 달러 상환 약속을 받아낸 것이다.

이를 계기로 재무 건전성을 강화한 현대건설은 2006년 매출액 5조원, 순이익 3900억원을 기록, 자본잠식서 완전히 벗어나 워크아웃을 조기 졸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