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신세계 개점 80주년인 2010년은 신세계백화점의 모든 점포 지역 1번점화, 온라인몰 시장 1위 도약, 이마트의 국내 최저가 및 저비용 구현 3대 목표를 이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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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정용진 부회장> | ||
이에 발 맞춰 신세계 백화점은 명동점이 개점 80주년인 오는 10월을 기념하기 위한 대대적인 연중 캠페인과 기념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다.
다소 이해하기 힘들지만 신세계가 개점 80주년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다름 아닌 현재 명동에 소재한 신세계 백화점 본점 자리에 일제 식민 치하인 1930년 10월, 일제 자본인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지점이 문을 열었기 때문.
미쓰코시 백화점은 일본을 대표하는 백화점으로 우리 땅에 세워진 사실상 최초의 근대식 백화점으로 한국에 거주하던 일본인과 친일 부유층을 상대로 각종 소비재를 공급하던 곳으로 과거 명동 상권의 핵심으로 군림하던 곳이다.
1930년 미쓰코시 백화점 설립 이듬해 1931년 조선인 자본가 박흥식(朴興植, 1903~1988)이 기존 화신상회의 3층 콘크리트 건물로 증·개축한 뒤 백화점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이듬해 화신상회 옆에 새로 건립된 동아백화점까지 인수해 명동 상권에 대적하는 종로통의 조선인 자본 유통업을 하게 됐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근대 백화점의 시작이다. 하지만, 이들 두 백화점의 공통점이 있다. 이들 두 백화점이 개점된 1930년대는 바로 일본 독점자본의 본격적인 진출과 경제 공황, 침략전쟁 준비의 부담을 조선인민들에게 부담 시키기 위한 첨병의 역할로 이들 백화점이 활용됐다는 것이다.
2010년은 경술국치 100년에 해당하는 해이자 삼성家의 설립자인 호암 이병철의 탄생이 겹친 의미가 있는 해이다.
미쓰코시 백화점, 화신 백화점 그리고 신세계 백화점. 이들의 역사적 상관관계와 지난 80년의 기록을 총 5회에 걸쳐 조선총독부 사료, 일제 식민치하 관보 및 신문기사와 기타 문헌을 중심으로 경술국치 100년 잊어 버린 우리 근대의 모습을 찾아봤다.
그 첫 번째로 신세계 백화점의 오도된 개점의 역사를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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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1930년대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점> | ||
신세계 백화점이 개점 80주년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명동은 사실 오욕된 역사의 잔재라고 할 수 있다. 명동(明洞)은 지금의 일본을 만든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주인공인 메이지(睦仁, 1852~1912)의 업적을 기리고 강제 병합한 조선에 그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 만든 곳이 메이지정(町), 즉 지금의 명동이다.
현재 덕수궁이라 불리우는 경운궁의 정문을 없애 버리고 웨스틴조선호텔 입구 앞 정원 처럼 처량하게 남아 있는 원구단을 철거하고 현재 서울 시청 자리에 경성부를 지었으며, 남산에 조선신궁을 만들어 그 일대를 일본의 상징으로 개조해버린 곳이 바로 명동이다. 그 중심에 바로 미쓰코시 백화점이 있었다.
백화점이 지어질 1930년 대의 경제 상황을 살펴보자. 일제는 1차 대전 이후 심각해진 일본 내 식량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을 적극 활용한다. 소위 '산미증식계획'이라는 농업약탈정책을 감행, 단기간에 엄청난 물량의 미곡을 일본으로 방출한다.
당시 총독부에 보고된 자료에 따른 연도간 미곡 동향을 살펴보자.
국권침탈 직후인 1912년~1916년에 조선에서 산출된 미곡은 1,203만석에 130만석을 수탈해 약 10% 수준이지만 미쓰코시 백화점과 화신 백화점이 태동 및 개점되는 시기인 1927년~1931년에는 생산량 1,579만석에 수탈량은 661만석으로 급증하게 된다.
두 기간 사이 생산증가 대비 수탈량 증가는 일제가 얼마나 치열하게 조선을 압박했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또한 수탈로 인한 영세 농가의 급증으로 지주에 의한 수탈 또한 증가해 당시 신문에는 지주가 수확량의 50~80%가 넘는 가공할 소작료를 강요해 농민들의 야반도주 관련 기사가 끊이지 않았다.
이와 연쇄적으로 연리 수백 %에 달하는 고리 채무까지 농민을 괴롭혀 판산, 몰락한 농민이 늘어나 1930년 총독부 집계 150,112명의 농민이 만주나 시베리아 등지로 쫒겨갔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등장한 곳이 바로 최초의 근대 백화점 미쓰코시 경성지점이다. 주로 수탈의 상층부를 구성하고 있는 일본의 자본가와 중간 단계의 조선인 출신의 매판 자본가 및 나라를 팔아 작위를 받은 중추원 귀족들이 주요 고객이다.
미쓰코시 백화점은 조선에서 형성한 수탈의 자본으로 귀금속은 물론 일본을 포함한 전세계 사치물품을 사 모을 수 있는 유일한 곳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이후에 등장한 화신 백화점 역시 한국인 자본이지만 그 자본 형성 과정 역시 일제와 크게 다르지 않아 떳떳한 역사의 한 장면이라고 할 수 없다.
화신 백화점의 창립자인 박흥식(朴興植, 1903~1988)은 수 많은 친일행위로 정부 수립 후에는 반민족행위처벌법 제4조 7항의 ‘비행기 ·병기 ·탄약 등 군수공장을 경영한’ 죄로 최초 구속 되는 친일 자본가 표징이다.
즉, 신세계가 주장하는 개점 80년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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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당시 신문기사 스크랩> | ||
"혹시 신세계 백화점 종로점을 아십니까"
다소 이상하게 들릴 지 모르지만 신세계 백화점이 지금 개점 80주년이라고 홍보하기 이전 1993년에는 생뚱맞게도 미쓰코시 백화점에 연원을 두지 않고 화신 백화점이 근대 백화점의 발상지라면서 이곳에 신세계 백화점 종로점을 짓기로 한 적이 있었다.
만약, 이 지점이 제대로 지어졌다면 아마 정용진 부회장은 내년에 개점 80주년을 이야기 했을지 모를 일이다.
그 사연은 이렇다. 현재 종각 맞은 편에 위치한 종로타워 자리는 과거 종로통 상권을 상징하던 화신 백화점이 있던 자리다. 이곳은 해방 이후 줄곳 백화점으로 활용되다가 삼성생명이 소유하면서 신세계 백화점 종로점 건설 계획을 발표 했다.
1930년대 화신 백화점의 분위기를 살려 아치형의 정문과 국내 근대 백화점의 발상지라는 알리기 위해 대형 기념물을 제작하는 등 신세계 백화점 종로점 개점을 대대적으로 홍보했었다.
당시 1993년 6월 5일 동아일보 27면 기사를 보면 상황을 알 수 있다.
"...(중략) 신세계백화점은 현재 삼성생명이 이 일대 대지 1천평에 지하 6층, 지상 18층, 규모로 짓고 있는 신축 건물이 내년 말 왼공되는 대로 이중 일부를 임대해 당시 화신의 전통을 잇는 종로점을 개관한다는 계획을 세워 놓고 있다. 신세계측은 이에 따라 30년대 화신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백화점 정문을 아치 형태로 제작하고 건물내 일부 벽의 문양도 당시 모습을 재현하기로 했다. 또 매장 중앙에 화신을 상징하는 대형 기념물을 제작해 이곳이 국내 근대 백화점의 발상지라는 사실을 젊은층 고객들에게 알린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 였다. 그 당시 설계는 미국의 건축가 라파엘 비뇰 리가 맡았는데, 지하 6층, 지상 18층, 높이 90미터 규모로 1994년 백화점 개점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1993년 골조공사가 완료된 이후 건축 변경 방침이 결정되는 바람에 공사가 전면 중단되는 우여곡절을 맞게 된다.
이 건물은 처음에는 백화점 용도로 사용하려 했기 때문에 건물 외벽에는 대형 광고물을 부착할 부분도 고안됐지만 곧이어 터진 외환 위기로 건물의 용도가 업무시설로 전환 되면서 역사 속에서 사려져 버렸다.
이미 오래된 내용이라 기억하는 이는 드물지만 분명히 신세계는 미쓰코시가 아니라 화신 백화점을 통한 한국 최초의 백화점 수식어에 최소한 관심을 가지고 홍보를 했던 것이다.
결국, 연초 정용진 부회장이 제시한 경영목표와 더불어 개점 80주년은 그 역사적 연원과 의미는 사실상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우리 역사에서 민족 구성원들의 피와 땀을 착취해 일군 침략 일본의 오욕의 역사에 축하할 일은 결코 아닐 것이다.
역사의 무서움은 바로 망각에 있는 것이다.
다음 편, 역사 정체성 상실된 신세계百 개점 80주년 대해부 - ②에서는 "일제 수탈 과정 속 미쓰코시 백화점 역할"에 대해 살펴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