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돌아왔다. ‘지난날의 허물’을 떠안고 회장직서 물러난 지 불과 23개월만의 일이다. ‘황제의 귀환’과 더불어 포스코경영연구소(포스리)의 한 보고서가 뒤늦게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지난해 중순께 발표된 이 보고서는 “오너경영에 대한 환상을 버리라”며 도요타 사태로 본 오너경영의 문제점을 낱낱이 담아내고 있다. A4용지 13매 분량의 보고서를 살펴봤다.
지난 2008년 4월 22일 오전 11시 5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침통한 표정으로 서울 태평로 삼성본관 지하 1층 국제회의장에 들어섰다.
“저는 오늘 삼성 회장직에서 물러나기로 했습니다. 아직 갈 길이 멀고 할 일도 많아 아쉬움이 크지만 지난날의 허물은 모두 제가 떠안고 가겠습니다. 그동안 저로부터 비롯된 특검문제로 국민 여러분께 많은 걱정을 끼쳐 드렸습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리면서 이에 따른 법적·도의적 책임을 다하겠습니다. 20년 전 저는 삼성이 초일류기업으로 인정받는 날, 모든 영광과 결실은 여러분의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돼 정말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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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이건희 삼성 회장이 최근 경영일선으로 돌아왔다. 도요타의 몰락을 보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는 게 삼성 측 입장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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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진짜 위기다. 글로벌 일류기업들이 무너지고 있다. 삼성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앞으로 10년 안에 삼성을 대표하는 제품들이 사라질 것이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앞만 보고 가자”
그룹 회장직 퇴진 이후 23개월 만의 일이다.
삼성 측에 따르면 이건희 회장의 경영복귀는 ‘도요타 사태’에서 비롯됐다. 글로벌 톱 기업의 몰락을 보면서 이건희 회장이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전 세계 제조업계의 우상이자 벤치마킹 대상이던 도요타는 올 초 대규모 리콜로 창업 이래 최대 위기를 맞았다. 3년 전 브레이크 이상을 보고받고도 모른 척 한 게 화근이었다. 특히 창업가문 출신 최고경영자가 취임한 지 1년도 안된 시점에서 일어난 사태였다.
◆삼성과 도요타 ‘무엇이 닮았나’
‘왕의 귀환’에는 언제나 ‘위기’라는 대의명분이 붙는다. 14년 만에 오너로 복귀한 도요다 아키오 사장도 그랬다.
2009년 6월, 도요타 창업가문 출신 아키오 부사장이 사장으로 전격 승진했다. 아키오 사장은 창업주인 도요다 기이치로의 장손이자, 명예회장인 도요다 쇼이치로의 장남이다.
도요타는 지난 14년간 도요다 집안 바깥에서 사장을 임명해 왔다. 그런 도요다 가문이 다시 회사를 접수한 까닭은 단 하나였다. 책임 있는 오너 경영자가 나서 전대미문의 금융위기를 극복해 나가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일본에선 ‘아키오 사장의 뒤늦은 대처가 도요타 사태를 부채질했다’는 비난여론이 거세게 일고 있다.
일본 월간지 ‘문예춘추’ 4월호는 도요다 아키오 사장의 경영능력에 의문을 제기하며, 오너경영의 한계에 대해 조목조목 짚었다.
오너경영의 한계가 드러난 건 리콜 사태 직후 첫 기자회견 때였다. 이날 기자회견에 나선 이는 아키오 사장이 아닌 품질담당 사시키 신이치 부사장이었다. 아키오 사장이 직접 나선 건 “사장은 어디서 뭘 하느냐”란 여론비난이 쏟아진 뒤였다. 대규모 리콜 사태 발생 2주나 지난 시점이었다.
◆포스리의 선견지명
이런 일련의 사태를 미리 예견한 곳이 있다. 포스코경영연구소(포스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아키오 사장이 경영일선에 복귀한 2009년 6월, 포스리는 ‘도요타자동차 오너 복귀와 그 시사점’이란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A4용지 13매 분량의 이 보고서는 오너경영과 전문경영의 장단점을 다각적으로 분석, 평가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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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지난해 작성된 포스리의 '도요타자동차 오너 복귀와 그 시사점'이란 보고서가 '왕의 귀환'시점에 맞춰 뒤늦게 화제가 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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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는 먼저 오너경영의 장점에 대해 “오너경영은 소위 ‘주인 있는 기업’의 특징인 조직 장악력과 강력한 리더십이 존재 한다”며 “여기에 신속하고 책임 있는 의사결정과 장기적 경영안목도 오너경영의 큰 장점”이라고 분석했다.
반면 오너경영 단점에 대해서는 “오너의 독단적이고 불투명한 경영이 견제되지 못할 경우 경영권 오남용과 사익추구 행위 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보고서는 “재벌오너들의 방만한 경영이 IMF외환위기의 주범으로 지목되면서 지난 10여년간 오너경영의 폐해와 기업지배구조 개선방안에 대해 많은 논의와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며 “금융위기를 맞아 오너경영체제가 다시 주목받고 있지만 과거의 폐해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선 경영자의 전문성과 자율성을 인정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어 보고서는 전문경영의 장단점에 대해 “전문경영은 유능한 경영인에 의한 효율적이고 투명한 경영이 가능한 반면 의사결정 지체 가능성과 단기실적에 집착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보고서는 경영위기 때마다 구원투수로 부각되어온 오너경영에 대해 회의적 입장을 보였다.
이와 관련 보고서는 “IBM의 루 거스너나 닛산의 카를로스 곤처럼 회사를 위기에서 구해낸 전문경영인의 사례도 많기 때문에 오너경영이 위기극복에 반드시 유리하다고 주장하기 어렵다”며 파나소닉과 도요타 사례를 예로 들었다.
보고서는 “파나소닉(마쓰시타전기)은 1990년대 무분별한 부동산 투자로 위기를 겪었으나 2000년 전문경영인 나카무라 구니오의 ‘성역 없는 개혁’으로 실적을 회복했다”면서 “2008년 10월에는 사명과 브랜드명을 창업가 성인 ‘마쓰시타’ 대신 파나소닉으로 통일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보고서는 또 도요타를 예로 들어 “도요타자동차의 전문경영인이었던 오쿠다 히로시(1995년 부임)도 일본경제의 버블붕괴에 따른 시장점유율 하락과 실적 악화 등의 위기상황에서 창업자 가문을 대신해 ‘스피드 경영’을 통해 2년 만에 순이익을 세 배나 신장시켰다”고 전했다.
◆‘이건희 카드’ 독이냐 약이냐
한편, 시민단체들은 ‘왕(이건희)의 귀환’에 일제히 비난성명을 발표했다.
경제개혁연대는 “삼성은 그룹 전체의 위험을 관리하고 비전을 제시할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것을 복귀 논거로 제시하고 있으나 삼성의 지배구조상 문제는 도요타 사태와 같은 불행한 상황을 예방하기보다 오히려 반대로 그러한 가능성을 증폭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경제개혁연대는 또 “이 전 회장의 복귀와 삼성전자 회장실 설치는 2년 전 경영쇄신안이 완전히 없던 일로된 것을 공식선언한 것과 다름없다”면서 “앞으로 어떤 노력을 통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것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참여연대도 이건희 회장 경영복귀에 쓴말을 쏟아냈다.
참여연대는 “이 전 회장의 복귀는 자타가 공인하는 글로벌 기업 삼성이 스스로는 개혁이 불가능한 집단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키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참여연대는 이어 “스마트폰 시대로 대변되는 현재의 글로벌 전자시장은 1인 오너의 비정상적 기업지배를 위한 통제와 관리라는 구시대적 경영으로는 결코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며 “글로벌 삼성에게는 기회가 아니라 오히려 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