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지혜로운 어머니’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바로 맹자의 어머니 ‘맹모’다. 맹자를 가르치기 위해 세 번 이사했다는 ‘맹모삼천(孟母三遷)’, 아들이 학업을 중단하고 돌아오자 짜던 베를 잘라 훈계한 ‘맹모단기(孟母斷機)’ 일화는 이미 전설이 됐다. 그렇다면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낸 기업인들의 어머니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한결미디어가 펴낸 <어머니의 힘>은 이러한 물음에 답을 제시하고 있다. 본지는 책의 내용을 토대로 한국 최고 경영인을 길러낸 어머니들의 생을 재구성해 기획 연재한다. 다음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어머니 박두을 여사의 생이다.
박두을 여사는 1908년 경북 달성군 묘동 농촌마을에서 박기동 옹의 넷째 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두리’라 불렸던 박두을 여사는 동냥 온 거지를 빈손으로 보내는 법이 없었다. 보리쌀 한 줌이라도 퍼줘야 마음이 편했다.
박 여사가 십오륙 세 되던 어느 날, 시주 나온 한 스님이 박 여사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귀인의 상이야, 아주 귀하게 될 상이 틀림없어. 처자는 앞으로 왕비가 되던지, 갑부가 될 사람을 만나 그 안방마님이 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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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어머니 박두을 여사를 본 한 스님은 '귀인의 상'이라며 '장차 갑부가 될 사람의 안방마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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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음력 12월 5일, 박 여사는 두 살 아래인 이병철(호암) 삼성그룹 창업주와 혼례를 올렸다. 당시 중동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호암에게 아버지로부터 편지 한통이 배달됐다. 혼담이 이뤄져 12월에 혼례를 올리게 됐으니 집으로 오라는 전갈이었다.
혼례는 구식으로 치러졌다. 어린 신랑은 초례청에 서서야 비로소 신부의 얼굴을 마주보게 됐다. 당시 이병철 창업주는 ‘신부가 참 건강한 여성’이란 느낌을 받았다.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창업주는 다시 서울로 상경했다. 학업을 마치기 위해서였다. 4학년 1학기 때 학교를 중퇴한 이 창업주는 곧바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 와세다 대학에 진학한 이 창업주는 학업에 열을 올렸지만 그만 각기병에 걸려 고향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허전함을 달랠 길 없던 호암은 어느새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일에만 열중하게 됐다. 피곤해진 몸으로 밤 그림자를 밟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했다. 이 때 그의 나이 스물여섯, 이미 세 아이의 아버지였다.
여느 때처럼 친구들과 어울리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온 호암은 잠든 아이들을 보는 순간 문득 꿈에서 깨어나는 느낌을 받았다.
이 창업주는 사업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거처도 도시인 마산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이 창업주는 정미·운수업을 시작했다. 사업이 크게 ‘대박’ 나면서 이 창업주는 200만평 대지주가 됐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호암은 하루아침에 ‘알거지’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래저래 사업을 정리하고 나니 단돈 2만원만 남았다. 이 돈으로 이 창업주는 새로운 사업에 도전했다. 사업을 정리한 지 6개월 만에 이 창업주는 대구에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박 여사는 고향집에 머물렀다. 결혼한 이래 함께 사는 것보다 떨어져 지낸 때가 더 많은 부부였다.
다행히 대구에서 시작한 제분소 사업은 바로 성공 궤도에 진입했다. 이 창업주는 약속대로 고향에 있던 박 여사와 아이들을 데려왔다. 이때부터 박 여사는 부지런히 제분소 일을 도왔다.
◆생활 속 근검절약
큰딸(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이 태어난 건 이 창업주가 일본 유학을 떠나 있을 때인 1929년 12월이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31년 6월 큰아들(이맹희: 제일비료 전 회장)을 낳았다. 이어서 박 여사는 차남 창희(새한미디어 전 회장), 차녀 숙희를 낳았고, 순희, 덕희, 건희(삼성그룹 회장), 명희(신세계그룹 회장)가 태어났다.
박 여사는 자식교육에 특히 남다른 정성을 기울였다. 아들 셋 모두를 일본으로 유학 보냈고, 딸들은 전부 대학 교육을 받았다. 다만 학과는 본인 적성에 맞는 분야를 선택하도록 했다.
박 여사는 오랜 세월 근검절약을 생활 속에서 실천해왔다. 이건희 회장은 유치원 때 소풍가던 날을 이렇게 기억한다.
“어머니는 다른 형제들보다 김 다섯 장과 삶은 달걀 한 개를 더 넣어주셨다. 그날이 바로 내 생일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배려를 해준 것이다.”
이토록 박 여사의 일상 속에는 근검절약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었다.
반면 이 창업주의 식단은 하나하나 소홀함이 없도록 정성을 다했다. 식성은 그리 까다롭지 않았다. 모든 음식을 다 잘 먹는 편이었다. 아침에는 흰죽, 콩죽, 잣죽, 콩 절임, 김, 생선구이 같이 가벼운 음식을 먹었다. 된장찌개, 된장국을 특히 좋아했다.
유교적 환경에서 자란 탓에 박 여사는 교회나 사찰엔 다니지 않았다. 그러나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보리쌀이라도 퍼주던 마음만은 늘 간직했다. 사회사업은 꺼렸지만, TV 등에 소개되는 어려운 사람을 보면 남몰래 당신의 저금통장을 전해주기도 했다.
박 여사는 며느리들에게 시어머니라기보다 출가한 딸을 돌보는 친정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가을에 햇곡식이나 과일이 들어오면 모두 불러 나눠주곤 했다. 며느리들 생일도 잊지 않고 챙겼다.
유교를 숭상하는 집안에서 전통적 부덕을 익히며 성장한 박 여사는 일생 동안 바깥 활동을 삼가고 집안일에 최선을 다했다. 특히 예의범절에 밝아 대소사를 두루 어루만지며 소홀함이 없도록 신경 썼다.
한편, 박두을 여사는 2000년 1월 세수 93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삼성은 박 여사의 유지를 기려 두을장학재단을 설립, 다음 세대 여성지도자들을 육성하기 위한 장학금을 지원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