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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포기하고 건설한 ‘I PARK’

[50대기업 대해부] 현대산업개발①…태동과 성장

박지영 기자 기자  2010.02.25 08:4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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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국내 대기업들은 대내외 경제 상황과 경영 방향에 따라 성장을 거듭하거나, 반대로 몰락의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기업일지라도 변화의 바람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2, 3류 기업으로 주저앉기 십상이다. 기업은 끊임없이 ‘선택’과 ‘집중’을 요구받고 있다. 국내 산업을 이끌고 있는 주요 대기업들의 ‘선택’과 ‘집중’을 조명하는 특별기획 [50대기업 완벽 대해부] 이번 회에는 현대산업개발을 조명한다. 그룹의 △태동과 성장 △계열사 지분구조 △후계구도 등을 세 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한국 자동차산업의 산 역사’로 불리던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이 현대그룹과 인연을 맺은 건 1957년. 정 명예회장은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넷째 동생이다.

   
 
1928년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난 정 명예회장은 1953년 고려대학교를 졸업한 뒤 1957년 미국 마이애미대학에서 정치외교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슬하에는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과 정숙영, 정유경 씨 등 3명의 자녀를 뒀다.

정 명예회장이 자신의 존재를 나라 안팎에 확실히 알린 계기는 1974년 최초의 국산 승용차 ‘포니’를 개발하면서부터다. 정 명예회장에게 ‘포니 정’이라는 애칭이 붙게 된 것은 이 즈음이다. 그는 이후로도 한국 자동차산업의 큰 획을 하나씩 그어 나갔다.

정 명예회장이 현대차와 작별을 고한 때는 1999년, 왕(정주영) 회장의 명령이 계기가 됐다. 장자 승계의 전통이 강한 현대가의 속성상, 그룹의 주력 기업인 현대차는 애초 그의 몫이 아니었다.

1998년 현대차가 기아차 인수하면서부터 정 명예회장과 현대차의 이별은 예견됐다. 1998년 말 기아차를 인수한 현대그룹은 자동차부문 구조조정 방안을 발표하면서 이사회 의장에 정 명예회장을 임명하고 정몽구 당시 현대 회장에게 현대차 회장직을 맡도록 했다. 

이듬해 3월 왕 회장이 정 명예회장을 불러들였다. 현대차 경영권을 정몽구 회장에 넘겨줄 것을 얘기하기 위해서였다. 정 명예회장은 이를 받아들였고, 현대차와 완전히 결별하게 됐다. 32년 자동차 인생이 마감되는 순간이었다.

정 명예회장은 당시 현대차를 떠나는 것에 대해 미련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큰 내색은 하지 않았다. 정 명예회장은 회고록 ‘미래는 만드는 것이다’를 통해 현대차를 떠날 당시 상황과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고인은 회고록에서 99년 3월 현대차를 떠날 당시 정주영 명예회장이 “몽구가 장자인데 몽구에게 자동차를 넘겨주는 게 잘못됐어?”라고 반문하는 바람에 3일 만에 아들인 정몽규 당시 현대차 부회장과 함께 자동차인생을 끝낼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정 명예회장이 건설인으로서 제2의 인생을 걷게 된 건 1999년.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에 취임하면서부터다.

그는 자동차산업의 능률과 합리적 사고를 건설업에 접목시키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선진경영 기법을 도입하는 데 주저치 않았고, 고객만족경영을 위해 투명한 기업경영과 정도경영을 실천했다. 또 전문 인력 양성을 위해 인재 육성에도 아낌없이 투자했다.

그 결과 정 명예회장은 건설인으로 새 인생을 연 그해 ‘아이파크’라는 국내 아파트 대표 브랜드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정 명예회장이 현대그룹에서 계열 분리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현대건설과 차별성을 두는 것이었다. 여기에 새 회사에 맞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기업이미지통합(CI) 작업에 들어갔다.

현대산업개발의 독자행보가 시작되는 2000년이 21세기의 시작이고, 새로운 회사를 의욕적으로 세워가는 과정이라는 뜻을 담아 탄생한 CI는 혁신(Innovation)의 이니셜 ‘I’.
 
그러던 2000년 2월 정 명예회장은 소비자에 기업 심볼을 각인시키기 위해 일대 사건을 일으켰다.

“선 굵게 대형 I자(字)를 본사 전면에 붙여봅시다. 조명만 제대로 밝히면 명물 이정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곧바로 당시 본사였던 국내 최대 규모의 오피스빌딩 ‘스타타워’ 앞·뒷면에 I자를 그려 넣은 가로ㆍ세로 각각 50펨토미터(㎙)짜리 천이 걸렸다.

반응은 뜨거웠다. 날씨가 좋으면 강남은 물론이고 강서구와 경기 광명시에서도 선명하게 빨간색 바탕에 하얀색 I자가 보여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광고도 주효했다. 2000년 1월 달나라에 아파트를 짓고, 사막에 오페라하우스를 짓겠다는 CF를 내보내자 “달나라와 사막에 언제 건물을 올리느냐”는 장난기 가득한 전화에서부터 “우리 회사와 합작하자”는 사업문의 전화까지 걸려오는 등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아이파크가 아파트 대표 브랜드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뭐니뭐니해도 품질이었다.
아이파크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널찍한 녹지와 연령별ㆍ성향별 공공 다목적 공간 등을 제공, 소비자를 유혹했다.

또 현대산업개발은 ‘장롱이 필요 없는 집’ ‘햇살 가득한 집’ ‘전망 좋은 집’ 등을 테마로 업계 최다기록을 줄줄이 갈아치우기 시작했다.

이뿐만 아니다. 현대산업개발은 전국 13곳의 애프터서비스 네트워크를 마련, ‘찾아가는 서비스’로 고객에 보답했다. 현대산업개발은 고객의 불만사항을 접수 즉시 해결해주는 ‘해피콜서비스’와 순회점검반을 결성, 직접 고객의 집에 방문해 하자를 보수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