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재벌총수 일가는 저마다 그림자로 불리는 ‘집사’들을 한명씩 두고 있다. 오너 일가를 최측근에서 보좌하는 그룹 ‘2인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 ‘2인자’들은 소수 정예부대와 함께 그룹의 재무·전략·기획 분야는 물론 계열사 간 얽히고설킨 자금구조 관리와 심지어 오너 가족의 지분 상속 및 경영권 방어까지 도맡아 한다. 특히 총수에 대한 충성심은 ‘본능’에 가까워 각종 비리문제가 터지면 총수를 대신해 종종 구속 수감되기도 한다. 총수의 ‘대리자’ 또는 ‘메신저’ ‘그림자’ ‘오른팔’로 불리는 그룹 ‘2인자’들이 살아가는 길에 대해 살펴봤다.
1990년대 후반, 재계를 중심으로 우스갯소리가 떠돌았다.
모 재벌그룹 오너가 당시 2인자로 평가받던 한 계열사 사장을 자기 차에 태워 고속도로를 달리며 얘기를 나누던 중 갑자기 역정을 냈다. 오너는 운전사에게 차를 세우라고 명령한 뒤 사장에게 “너, 당장 내려”라고 소리쳤고, 사장을 고속도로 갓길에 세워 둔 채 그대로 떠났다.
재계에는 이와 비슷한 소문이 적잖다. 오너가 자기보다 열 살이나 많은 계열사 사장의 정강이를 걷어찼다느니, 가족과 함께 휴가를 가던 사장이 “오너가 찾는다”는 전갈에 고속도로에서 차를 U턴했다느니 하는 소문들이다.
◆무대 뒤 실세들
기업에는 1인자가 있고 그를 보필하는 2인자가 있다. 겉보기에 그들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에 오른 인물들이다. 그러나 대다수 2인자들은 ‘만인지상’의 영광보다 ‘일인지하’의 그늘을 더 강하게 겪었다. 위기 상황이 생기면 본능적으로 전면에 나서 총수를 보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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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 삼성 2인자로 꼽히는 이학수 전 전략기획실장. 이 전 실장은 삼성X파일 사태로 지난해 실형을 선고받았다> | ||
“이건희 회장의 재산은 주식이 제일 많고, 주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평균 1조원이 넘는데요. 회장 사재는 구조조정본부 정무팀에서 관리하고, 나는 감독하는 역할을 합니다. 십 수 년간 회장님을 가까이에서 모셨는데, 회장님이 1년의 절반을 해외에서 체류해 일일이 전화해 물어보기도 어렵고…, 회장님이 ‘알아서 하라’는 묵시적 승인이 있습니다. 나 스스로가 회사와 회장님을 위한 것이라는 판단에서 (사재를) 사용해왔고, 회장님은 나를 신뢰해 왔습니다. 제가 알아서 회사를 위해 이 회장 개인의 돈을 썼을 뿐입니다”
지난 2004년 6월,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 최완주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법정에서 이 실장이 한 말이다. 끝내 이 실장은 이건희 전 회장과의 연관을 부인했고, 결국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았다.
2인자들의 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가장 큰 예로는 2003년 불법대선자금 사건을 들 수 있다. 이때 입건된 사람들은 돈을 덴 1인자가 아닌 배달책이었던 2인자들이었다.
당시 불법대선자금 사건에 연루돼 실형을 선고받은 2인자들은 △손길승 전 SK그룹 회장을 비롯 △김동진 현대자동차 총괄부회장 △강유식 LG그룹 부회장 △신동인 롯데쇼핑 사장 △박찬법 아시아나항공 사장 △오남수 금호아시아나그룹 사장 △김연배 한화증권 부회장 △심이택 대한항공 부회장 △이재경 두산그룹 사장 등이다.
그러나 사건 이후 이들의 그룹 내 위치는 더욱 견고해졌다고 한다. 실제 배달책 역할을 했던 대부분의 2인자들은 현재까지 자리를 유지하거나 더 좋은 곳으로 둥지를 옮겼다.
특히 김연배 한화증권 부회장은 형 집행을 모두 마치고 바로 현업에 복귀, 현재 한화 부회장으로 승진한 상태다.
◆‘나가라’ 말 못해
그룹 2인자에 대해 재계의 한 관계자는 “소위 그림자로 불리는 2인자들은 항상 총수일가를 위해서만 움직인다”면서 “그들은 총수일가에 위기 상황이 생기면 본능적으로 전면에 나서 총수를 보호하고 각종 세간의 뭇매를 혼자 맞는다”고 귀띔했다.
그는 이어 “특히 각종 비리문제가 터지면 이들은 총수를 대신해 종종 구속 수감도 불사하며 심할 경우 목숨도 내놓을 정도”라며 “이후 그들은 자칫 총수일가의 경영권에 누가 될 가능성마저 제거하기 위해 형집행을 마치면 은둔생활에 돌입하는 게 이곳 세계에선 공식으로 여겨진다”고 덧붙였다.
재계의 또 다른 고위 관계자는 “재벌의 모양과 성격 자체가 바뀌지 않는 한 주력 인사들의 2선 후퇴는 없을 것”이라며 “총수 중심 체제에서 그 재산 및 경영권 보호의 첨병 역할을 해온 사람을 무작정 갈아치울 수 없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한 사람을 움직이려면 그룹 전체의 색깔과 인사가 다 바뀌어야 한다”며 “또 막말로 알고 있는 비밀이 한두 가지도 아니고,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 한 ‘나가라’고 말하기는 정말 쉽지 않다”고 덧붙였다.
이렇듯 총수를 대신해 ‘궂은일’을 맡은 2인자들은 검찰에 몇 번 출두하고, 언론에 불법자금 전달자로 찍혀 창피를 당하지만 총수의 신임과 함께 그룹 내 입지를 확고히 다지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결론적으로 그들에겐 ‘남는 장사’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