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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년 역사'는 한국현대사 큰 족적

[50대기업 대해부] 현대건설-태동과 성장 그리고 환골탈태

박지영 기자 기자  2009.10.26 11:2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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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현대건설의 역사는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한국의 경제발전사와 맥을 같이한다. 현대건설의 모태는 1947년 5월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설립한 현대토건사. 이후 현대건설은 한국 건설사에서 ‘최초의’라는 관용어를 모두 휩쓸다시피 했다. 이런 현대건설에 97년 시련이 닥쳤다. IMF 여파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경영권 분쟁으로 현대그룹 대외신인도가 추락하면서 부도설마저 나돌았다. 특별기획 [50대기업 대해부]를 통해 현대건설의 △태동과 성장 △지분구조 △후계구도 등을 집중 해부한다.

   
 
1915년 초겨울(11월25일),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 산골마을에서 고 정주영 회장이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그러고도 5남2녀를 더 두었다. 살림은 늘 쪼들렸다. 정주영 회장에게 주워진 건 뼈 빠지게 일해도 도무지 헤어날 길 없는 가난이 전부였다.

“농촌에 주저앉아 살면 아버님의 인생이 바로 내 인생이 된다는 것은 안 봐도 뻔했다. 그래서 네 번의 가출을 했다. 부두ㆍ공사장 막노동에서 엿 공장으로, 엿 공장에서 쌀가게 점원으로, 점원에서 미곡상 주인으로 직장을 옮긴 것이 한 걸음씩의 발전이었다.”

계속된 가출 끝에 안착한 곳이 경성의 ‘복흥상회’라는 쌀가게였다. 특유의 성실함과 근면함으로 정주영 회장은 38년 서울 중구 신당동에 ‘경일미곡상회’라는 쌀가게를 차리게 된다. 이 때 정 회장의 나이 스물셋이었다.

첫 시련은 경일미곡상회를 개업한 지 일 년도 채 안 돼 다가왔다. 39년 일제의 전시체제령에 따른 쌀배급제로 부득이 사업을 접어야만 했던 것이다.

◆쌀집 점원에서 기업 총수까지

이대로 주저앉을 순 없었다. 정 회장은 26세던 40년 3월, 두 명의 동업자와 함께 다 쓰러져가는 자동차수리공장(아도자동차수리공장)을 인수했다. 훗날 이 공장은 정 회장을 국내 굴지의 재벌기업가로 만드는 계기를 제공하게 된다.

그러나 이마저도 43년 일제에 의해 그만두게 된다. 일제 치하 기업정리령에 따라 조선인들의 기업 활동에 제한이 생긴 것이다. 자동차정비업에서 잠시 손을 뗀 정 회장은 이후 운수업에 간여했다. 

정 회장이 다시 자동차사업에 발을 담근 건 해방 직후인 46년 4월께다. 그는 서울 중구 초동에 ‘현대자동차공업사’란 간판을 달고 자동차 정비업을 시작했다. 이때의 영문상호는 오늘 날 현대자동차와 같은 ‘Hyundai Motors Company’였다.

현대자동차공업사는 나날이 번창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정 회장에게 새로운 사건이 발생했다. 자동차를 수리한 값을 받으러 갔다가 자신은 일한 대가로 30만~40만원을 받는데 반해 건설업자들은 1000만원이라는 거금을 받아가는 걸 목격한 것이다.

물론 정 회장의 결심에 동업자와 가족들은 한사코 반대했다. 건설업을 할 만한 돈도 없거니와 경험도 없다는 이유에서다. 정 회장은 예외 없이 “해봤어?”로 맞서며 건설사를 차린다. 47년 5월25일의 일이다.

건설업은 정 전 회장 스타일에 딱 맞았다. 50년 1월, 정 전 회장은 현대토건과 아도자동차수리공장의 후신인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해 지금의 현대건설을 설립했다.

   
<사진설명= 1983년 당시 정주영 회장이 현대중공업 생산현장을 방문해 선박의 프로펠러 위에서 작업하는 직원과 이야기 나누는 모습>
 
◆60년대 개발주역, 건설업 ‘큰형님’

6ㆍ25동란이 터지면서 부산으로 내려온 정 회장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방한을 앞두고 UN묘지에 잔디를 심어달라는 주한미군의 제의에 낙동강의 보리를 베어와 그곳에 심었다. 완벽한 시공에 감탄한 미군은 ‘원더풀, 굳 아이디어’라며 ‘현다이 넘버원’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군 공사는 모두 ‘정주영 것’이 됐다.

특히 68년 12월 현대건설은 우리나라의 첫 고속도로인 경인고속도로를 개통했고, 70년 경부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전국이 1일 생활권으로 바뀌게 됐다. 당시 경부고속도로 건설현장에는 군대까지 파견돼 세계의 건설 역사상 유례없이 290일 만에 공사를 마치게 된다.

현대건설이 본격적인 성장기에 들어선 것은 해외수주에 눈을 돌리면서부터다. 비록 적자가 났지만 65년 베트남의 파타니나라티왓 공사 수주는 국내 건설업 사상 최초의 해외공사 수주로 기록됐다.

현대건설의 주베일산업항 공사 수주는 말 그대로 한 편의 드라마였다. 애당초 입찰 참가도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낙찰이어서 더 그랬다.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의 건설시장은 다른 해외 시장과 마찬가지로 선진국의 독무대였다. 단지 10개사만이 초청 대상이던 주베일 산업항 입찰에도 일본 건설사는 한자리도 끼지 못할 정도였다.

현대건설은 단 한 건의 이 공사를 수주함으로써 당시 우리나라 예산액의 절반과 맞먹는 규모의 외화를 벌어들였다. 당시 최악의 외환사정으로 곤란을 겪던 우리 정부에도 이 소식은 낭보 중의 낭보였다. 주베일 산업항 공사수주는 국가를 부도위기에서 구출해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

   

<현대건설 김중겸 대표>

이어 현대건설은 66년 베트남 준설공사 등을 수행하면서 해외곳곳에 세력을 뻗어가기 시작했다. 호주와파푸아뉴기니, 인도네시아를 거쳐 70년대 후반 중동지역으로 이어졌다. 특히 76년 수주한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산업항 공사는 9억3000만달러 규모로, 현대건설은 매년 1000명씩을 신규채용해야 했다.

80년대 들어서면서 현대건설은 시장다변화와 기술집약적 시공분야로 도약을 꾀했다. 대체에너지원인 원자력 개발에 발맞춰 70~80년대에는 고리, 월성, 영광에 차례로 원자발전소를 건설했다.

또 88올림픽고속도로 건설공사와 호남고속도로, 부산지하철 1호선 토목공사 등에 참여해 사회간접시설을 건설하는 데 한몫 했다. 90년대에는 싱가포르 창이공항 매립공사와 파키스탄의 차스마 수력발전소, 방글라데시의 자무나 교량 등의 대형공사를 맡았다.

특히 90년대 후반 현대건설의 가장 중요한 일지 중 하나는 금강산 관광단지개발, 북한의 서해공단개발 등 대북사업을 주도한 점이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으로 대표되는 대북사업은 ‘대북사업=현대건설’이라는 등식마저 만들었다.

◆IMF와 형제의 난으로 한 때 내리막 

40여년 동안 건설업계 부동의 1위를 고수하던 현대건설에 97년 위기가 닥쳤다. IMF사태는 현대건설의 기반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게다가 2000년 그룹 후계 구도를 둘러싼 ‘왕자의 난’이 일면서 신뢰도도 추락했다. 결국 그해 7월 현대건설은 신용평가회사로부터 신용등급을 하향조정 당했다.

결국 건설명가 현대건설은 2001년 채권단에 경영권이 넘어가 워크아웃 절차를 밟는 운명을 겪어야 했다. 당시 현대건설의 성적표는 2조9000억원의 적자에 4조4000억원의 부실을 떠안은 자본 잠식 상태였다.

워크아웃을 벗어나기 위한 현대건설의 노력은 눈물났다. 그 결과 2005년, 이라크로부터 6억8000만 달러를 상환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고, 이를 계기로 재정 건전성이 강화됐다.

비록 유동성 위기를 맞았지만, 시공능력에 관한 한 현대건설을 따라 올 기업은 국내엔 없었다. 현대건설은 워크아웃 기간 중에도 청계천 복원 공사를 비롯해 국내 최대 컨벤션 센터인 아셈타워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해냈다.

특유의 기술력과 응집력으로 워크아웃도 빨리 졸업했다. 현대건설은 2006년 매출액 5조원에 순이익 3900억원을 기록, 자본잠식 상태서 벗어났다.